군포를 대표하는 요식업체 중에 화덕피자로 소문난 곳이 있다. 갈치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뛰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한 카페레스토랑 <이백>의 신록 아래 서은주 대표를 만났다.
Q1. 안녕하세요. 우선 대표님과 가족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1. 저는 1959년 경주 태생인데 젊어서부터 한복의상 일을 했어요. 고교 졸업 후 5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관두고 20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의상 수업을 받았습니다. 군포가 신도시로 개발되기 몇 해 전 군포 사거리, 반월 등지에서 10여 년간 공방을 열었다가 금정역과 산본시장 사이 자유문고 바로 옆에서 25년가량 <신사임당>이라는 한복의상실을 차려 명성을 쌓았지요. 소문 듣고 서울, 지방에서도 찾아오고 잘 나갈 땐 하루 매상이 2천만일 때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신사임당>을 시작할 무렵 30대 중반에 지금의 남편 이수천(도예가)과 결혼, 1994년에 아들 이마로(화가)를 낳았지요. 그런데 아들이 자폐아였어요.
Q2. 식당 <이백> 오픈과 자폐아 아들이 상관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군요 A2. 맞습니다. 외동아들인 마로의 건강과 성장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들이 태어난 이후 남편과 고심 끝에 자연경관이 좋은 이곳에 땅(약 500여 평 대지)을 사서 거주 공간과 공방을 겸한 카페레스토랑을 열었습니다. 땅값의 절반 이상을 대출받아 고액의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느라 사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남의 땅에서 가족의 꿈을 이루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자폐아들 돌보랴, 한복 의상 일하랴, 식당 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살았습니다. <이백>은 초기부터 이탈리안 경양식 메뉴로 시작했으나 주방일과 홀서비스 일체를 외부직원에게 맡기다 보니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만성 적자에 허덕였지요. 의상실에서 번 돈으로 메꾸는 상황이 10년 이상 이어져 식당 개업 12년까지 의상 일을 관둘 수 없었던 거지요
Q3. 많은 방문객이 <이백>하면 화덕피자를 떠올리는데... A3.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화덕피자를 시작한 건 10년이 채 안 됩니다. 시행착오를 겪다가 요식업 특성상 주방에서 모든 게 시작됨을 뼈저리게 느끼던 중 남편이 터키 해외 출장을 갔다가 그곳의 화덕피자 맛에 매료되어 아예 일주일간 그곳에 눌러앉아 조리법을 배워 왔어요. 그리고는 제가 조리법을 또다시 전수받았지요. 총 8가지의 다양한 피자를 맛볼 수 있는데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맛은 외국인들도 호평할 정도입니다. 향을 최대한 살리도록 로스팅해서 내놓는 커피와 직접 숙성시켜 내놓는 차 맛도 손님들 반응이 좋습니다.(웃음) 사실 이 모든 게 남편의 공로예요. 손재주가 좋아서 화덕도 직접 만들고 빵도 직접 구워내고 화덕피자 메뉴도 직접 해 주었으니까. 감사할 따름이죠.
Q4. 평소의 좌우명이나 식당 경영철학을 밝힌다면 A4. ‘나눔 실천’이랄까요. 누구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행복할 권리를 가진다고 봅니다. 우리 부부가 아들 마로에게 쏟은 정성 덕분인지 아들은 발달장애 상태에서도 화가의 길을 행복하게 잘 걸어가고 있는 걸 보면서, 저희 식당을 찾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저희가 설계하고 만든 집에서 저희가 손수 심은 화초와 작품들을 감상하며 저희가 만든 식탁과 의자에 앉아 저희가 만든 음식으로 행복을 만끽하고 가시길 바라는 거지요.
Q5. 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군요 A5. 지난 3년간 1억 원 정도의 적자를 보았습니다. 매출이 반토막이 나도 직원 급료는 지급해야 했으니까요. 코로나 전에는 정규직 4명, 주말 알바 3명을 고용하고 있었지요.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알바 1명이 자진해서 관뒀어요. 제 손으로 직원을 퇴사시키진 않아 코로나 전과 후의 변화는 단지 매출이 줄었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사태를 대비해 1억 원가량의 비상금을 비축해 둔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좌우명처럼 고통도 함께 나눠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지금은 손님 수가 점차 회복되고 있으니 또다시 비상금을 비축할 수 있는 날이 곧 오리라고 봅니다.
Q6. 현재 <로아트> 비영리사단법인 이사장을 맡고 계신 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6. 영어 raw는 ‘날것의, 가공하지 않은’이란 뜻이잖아요. ‘발달장애 예술가의 모임체’라는 의미로 지난 2019년 2월에 발족하여 현재 제 아들을 포함, 8명의 발달장애 화가를 300여 명의 후원회원이 돕고 있습니다. 당시 이학영 국회의원님의 조언대로 혼자 힘으로 하기보다 비영리사단법인을 결성, 공동의 힘을 모아보라는 격려의 말씀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지요. 이후 예술인전문법인, 지정기부단체, 예비사회적기업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현재 대야미역 근처 신협 건물 3층에 창작 공방과 행정지원 사무실을 두고 있습니다. 매년 열어온 전시회가 올 8월에도 군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가 할 일은 발달장애 예술가들도 신체적 결함을 딛고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귀 신문사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Q7.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가 있다면 A7. 3년 전 포럼 참석차 독일 쾰른이란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폐양조장을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해줘 죽은 공간을 이들이 살려내어 많은 시민이 찾아줄 만큼 활성화시킨 사례를 직접 목격하고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최근 군포시에 발달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을 계속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의가 실현된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공간’ ‘문화도시 군포의 한 축을 장식할 공간’을 만들어 지역 사회에 공헌하고 싶습니다.
기자 후기_똑순이 같은 그녀의 표정은 밝고 목소리는 활달하다. 매사에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숱은 허옇고 얼굴에는 주름투성이다. 자폐아의 엄마로, 두 가지 일을 억측스레 견뎌낸 대표로서 내공과 인고의 시간이 만들어준 흔적이 배어날 수밖에 없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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