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로 한평생, '유천화실' 오수철 화백

아름다운 군포사람들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2/11/02 [07:28]

사군자로 한평생, '유천화실' 오수철 화백

아름다운 군포사람들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2/11/02 [07:28]

  이제 갓 육순에 접어드는 국전초대작가 유천 화백의 화실은 언제나 분주하다. 주작야주(晝作夜酒), 낮에는 홀로 사군자를 치고 밤에는 여럿이 술잔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동네 사랑방 같은 그의 화실을 잠시 염탐해 보았다.

 

▲ 오수철 화백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Q1 어쩌다 문인화가로 입문하게 되셨는지?

  유학자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예향(禮鄕)인 남원에서 어릴 때부터 서예를 배웠고, 19세에 군산으로 이주하면서 그곳 제일의 문인화가 남천 정연교 선생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화랑을 하며 국전초대작가 반열에 들어섰던 큰형 故 오석재의 추천이 입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셈이었지요. 초기부터 수년간 매일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하루종일 사군자를 그렸습니다. 그 덕택인지 25세 때 처음으로 국전에서 입선한 뒤 10년간 특선 1번, 입선 7번을 내리 수상하며 30대 중반에 저도 큰형을 따라 국전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Q2. 군포와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맺어졌는지?

  서른 나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신혼살림을 대전에서 차렸으나 거기와는 터가 안 맞았던지 1년 만에 서울 가까이로 이사하게 되었고 우연히 연고도 별로 없는 군포로 들어오게 된 거지요. 그때가 아마 1994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한참 혈기왕성했던 때라 2년 정도로 군포살이마저 접고 6년가량 상계동 응암동 일대를 떠돌았고, 잠시 남양주 덕소에까지 화실을 냈다가 모든 걸 접고 다시 돌아와 25년째 군포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멈추고 군포에 정착한 이유는 주거비가 비교적 싼 점도 있었지만 힘들 때마다 나를 위로해주는 수리산 임도는 물론 인생이모작예비협동조합 ‘9988클럽’ 회원들과 예술협업단체 ‘만지작동맹’ 예술인들과의 교유가 큰 몫을 차지해서였어요. 

 

  Q3. 알기로는 30년 가까이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데?

  그렇네요. 30대 초반 대전에서의 신혼 생활 때부터 지금껏 화실을 열어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35세 때부터는 익산 원광대 동양화과에 2년간 출강하였고, 서울 양천도서관 10여 년 강의 등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미술 지도를 했습니다. 오랜 미술 지도를 통해 터득한 점은 “가르침이 곧 배움”이라는 교훈입니다. 가르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학습커리큘럼도 그렇지만 제자들의 배움에 대한 열기가 강할수록 저의 예술혼도 한껏 고취되니까요. 애제자가 여성이 많아 저의 여성 편력을 의심받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성이 남성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자유로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 만큼 배우는 수강생에 여성이 많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웃음)

 


  Q4. 전업 문인화가로서 보는 일반 예술론과 사군자 예찬론은?

  근현대 우리나라 미술사를 돌아보면 공교롭게도 우리에게 가장 많은 시련을 안긴 일제강점기~한국동란 전후에 명작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각종 문명이기의 발달과 높은 경제성장이 감각기관의 퇴화를 불러오는 게 아닐까요. 달걀은 안에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밖에서 깨면 달걀후라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깨침의 경지”라고 여깁니다. 과거의 명인에겐 부끄럽지 않고 현재의 선후배에겐 뒤지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음악에 장르가 있듯 미술에도 전통 필법을 중시하는 클래식이 있습니다. 저더러 맨날 사군자만 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클래식 음악가가 그 분야에만 몰두하여 클래식의 대가가 되는 것처럼, 저 또한 전통 사군자에만 천착하여 그 분야 일인자가 되는 게 꿈입니다. 올해 들어 포도 그림을 몇 점 그렸더니 드디어 제가 영역 확장을 하나보다 여길 수 있겠으나 포도는 국화의 5분의 1 기법이면 그려낼 수 있는 아류에 불과합니다. 확언컨대 매란국죽에 능숙하게 되면 삼라만상을 다 그려낼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사군자가 ‘내밀한 제 자신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기에 아직은 달리 한눈을 팔지 않는다고 여겨 주세요.

 

  Q5.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는?

  나이 육십이 되기까지 이미 전업의 길로 들어선데다가 군포에 정착하여 활동할 생각이라서 지역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생각입니다. 내년에는 회갑기념전도 구상 중이고 꾸준히 이어온 지역작가들과의 공동전시회도 정기적으로 가지고자 합니다. 예술가의 전업 활동은 가시밭길이지만 순응하기에 따라 꽃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방하착(放下著)과 무위(無爲)의 안목으로 제가 지향하는 예술 세계에 영혼을 쏟아붓고 싶습니다. 

 

  기자노트_유천 화백은 술(酒) 장복 예찬론자이다.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다. 한편 그는 붓을 드는 일도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한 마디로 생계형 작가인데, 보기엔 늘 한가롭고 여유롭다. 노래도 잘 부르고, 요리도 우스갯소리도 일품이다. 돈 버는 일만 빼면 나무랄 게 하나 없다. 가장 결정적인 결함을 어떻게 메꿀지만 걱정이다. 도움을 주거나 그림을 배우실 분은 유천화실(금정 삼성아파트상가 2층)을 찾아주기 바란다.

 

▲ '유천화실'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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