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설날 한양 나들이

남산한옥마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서울대병원 및 대학로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3/01/25 [09:17]

계묘년 설날 한양 나들이

남산한옥마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서울대병원 및 대학로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3/01/25 [09:17]

  계묘년 설날 당일, 서울 남산한옥마을과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한 바퀴 돌았다. 지난달 어머니 기일 차 부산에 다녀왔고, 다음 달에는 조카딸 혼례 차 또 내려가야 해서 이번 설은 건너뛰기로 해서다. 나들이 장소를 굳이 서울로 잡은 이유는 옛 지명인 한양의 도성 안은 우리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들이 즐비해서다.

 

▲ 남산한옥마을 계묘년 설날 맞이 행사 (사진=신완섭)


  1착, 남산한옥마을

  정문을 들어서자 청학지(靑鶴池) 뒤 천우각에서 풍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미 방문객들이 공연장을 에워싸 명절 분위기가 흠씬 풍긴다. 주변 마당의 부스에서는 명절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어서 캘리 써주기 코너에서 붓글씨 한 점을 선물 받았다. 내가 부탁한 문구는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였다. 무료로 글씨를 써주신 향원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인근 한과 코너에서 오란다(Holanda, 일명 맛도라) 한 봉지를 사 들고 청류정-이희승선생학덕추모비-관어정-천년타임캡슐광장-피금정 등을 돈 뒤 한옥마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딸깍발이>로 유명한 일석 선생 추모비가 여기에 세워진 이유는 생가터가 여기에 있어서다.

  남산 북쪽 기슭인 필동 일대는 경치 좋기로 소문 난 한양 5동(삼청동·인왕동·쌍계동·백운동 포함)의 한 곳으로, 1998년 이곳에 민속자료 한옥 다섯 채를 이전 복원했다. 바로 삼각동 도판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영휘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덕영 가옥이다. 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 가옥은 ㄴ자형 안채에서 부엌과 안방 쪽이 반오량(半五樑)으로 지붕 높이를 달리 한 게 특징이고, 오위장 김춘영 가옥 또한 평민의 주택 양식을 띠면서도 화방벽(火防壁)으로 집의 격조를 높인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 가장 크고 화려한 윤택영 윤덕영 형제의 가옥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무리 윤택영이 순종의 장인이자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이고, 윤덕영이 택영의 친형이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들 이들은 대한제국을 망치게 한 매국노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이완용보다 더한 ‘일완용’이라 욕하겠는가. 번드르르한 외양 못지않게 민족혼을 담아야 할 곳인데, 매국노 집안의 가옥을 모델로 삼은 것은 개운치가 않다. 두어 군데 침만 뱉고 돌아섰다.

 

▲ 남산한옥마을 (사진=신완섭)


  2착, 경복궁

  을지로역 근처에서 점심 요기로 장국을 한 그릇 떼우고 3호선 전철로 경복궁역에 당도했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시각임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참고로 명절 연휴 기간에는 서울 시내 모든 고궁 출입이 공짜다.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離宮,궁정동 일대) 터를 마음에 두었으나 새 왕조의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서 그 남쪽 일대에 따로 자리 잡았다. 태조 3년(1394) 10월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이듬해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詩經>의 '君子萬年 介爾景福' 글귀를 따 경복궁(景福宮)이라 했고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는 등 성을 비운 때가 길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실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1865년 중건에 착수, 1888년(고종 25)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 오늘날 경복궁의 토대가 되었다. 근정전(勤政殿)을 지나 민속박물관 쪽으로 가 보았으나 개관하지 않아 경회루 쪽으로 해서 청와대가 보이는 영추문(迎秋門)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청와대 뒤로 북악산에 오를까 고민하다가 걸음을 북촌-인사동-안국동-창덕궁 쪽으로 돌렸다.

 

▲ 경복궁 (사진=신완섭)


  3착,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 일군의 무리가 몰려있다. 다가가 보니 고궁 해설사의 설명이 한창이다. “창덕궁이 제일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1997. 12)된 이유는 서울 궁궐 중 중건 연도가 가장 오래되었고 주변 비원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참에 창덕궁을 좀더 상세히 들여다 보기로 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로서 창건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편전인 선정전(宣政殿), 침전인 희정당(熙政堂), 대조전(大造殿) 등 중요 궁궐전각이 완성되었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敦化門)이 건립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여 평이던 후원(後苑)을 넓혀 15만여 평 규모로 경역을 크게 확장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을 시작, 광해군 5년(1613)에 공사를 끝냈으나 1623년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한 궁궐전각이 크게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 다시 복구했다. 1917년 화재로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강녕전(康寧殿) 등 여러 건물을 뜯어 이곳으로 이건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法宮)이었다. 연산군을 필두로 효종 현종을 거쳐 마지막 순종 때까지 조선을 통틀어 총 8명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해설사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돈화문에서 통금을 알리는 종을 밤 10시에 28번 울리고(인정;人定) 새벽 4시 해금을 알리는 종을 33번 쳐(파루;罷漏) 이 소리가 종로까지 전해졌다. 그 소리를 이어받아 종로의 종각에서 반복하여 인정과 파루로 통금 시간을 민가에 알렸다. 안쪽 금천교(錦川橋) 너머 진선문(進善門)에 신문고를 둬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장치를 마련했으나 일반 백성이 접근하기에는 다분히 상징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선정문 앞 복원이 되지 않은 승정원과 사간원 사헌부의 도승지와 사관은 임금의 정사에 사사건건 직언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마마, 아니되옵니다’였다. 

  불과 7살에 왕이 된 헌종(1827~1849)은 정조와 같은 성군이 되고자 낙선재(樂善齋) 일대를 세웠으나 22살에 요절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후궁 경빈 김씨(1831~1907)와 대왕대비 순원왕후(1789~1857)에게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를 마련해준 이래 근현대로 들어오며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1894~1966),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1901~1989),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1912~1989)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중 경빈 김씨는 헌종 13년(1847) 16살 나이로 후사를 위해 입실했으나 끝내 자식을 보지 못했다. 세종이 자식 25명을 두었던 조선 중기 이전과는 달리 후기로 넘어오면서 왕의 자식들이 적어진 이유는 세도정치와 당파싸움으로 왕권이 약화된 것과 무관치 않다. 더욱이 제조상궁이 길일을 골라 합궁 날짜를 정해주다 보니 왕과 왕비의 합방은 한 달에 한 번꼴에 불과했다”고 한다. 왕 노릇하기도 무척 힘들었겠구나 여기며, 창경궁 가는 길로 들어섰다. 

 

▲ 창덕궁 (사진=신완섭)


  4착, 창경궁

  원래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게 된다. 이때의 확장공사는 성종 15년(1484) 명정전(明政殿)·문정전(文政殿)·통명전(通明殿) 등 주요 전각을 완공하고 이름도 창경궁(昌慶宮)으로 바꿨다. 이듬해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으나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뒤 창경궁은 임진왜란(1592) 때,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순조 30년(1830) 때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전각이 재가 되었다. 궁의 복구는 순조 33년(1833)에 이루어지는데 통명전을 비롯, 환경전·경춘전·숭문당·함인정·양화당·영춘헌·오행각 등의 중건을 이듬해 마무리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이때 세워진 것들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마자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다.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융희 3년(1909)에 개원한 것이다.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는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일본인이 심어놓았던 벚나무도 뽑아냈다. 1986년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했으며, 자경전 터의 박물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넘겨준 뒤 1992년 헐고 지금은 녹지가 되었다.

 

▲ 창경궁 (사진=신완섭)


  5착, 서울대병원 및 대학로

  시각이 4시가 될 즈음 문인화가 O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설날 제주(祭酒)나 한 잔 하자” 길래 그러자고 했다. 이젠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홍화문을 빠져나와 혜화역으로 가기 위해 지름길인 서울대병원으로 넘어갔다. 가다 보니 병원 본관 앞쪽에 지석영(1855~1935)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일본에서 종두법(種痘法)을 배워 와 국내에서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한 의사이다. 

  대학로로 내려온 김에 독립운동가 김상옥(1889~1923) 의사를 알현했다. 도로 건너편 대학로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다. 그는 동대문 일대에서 태어나 혁신단을 조직, 조선총독 암살과 적 기관 파괴 등의 계획을 세우다 상해로 잠시 피신한 후, 국내로 돌아와 1923년 1월 12일 밤에 일경의 중심이자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거행하고 열흘 뒤인 22일 새벽 피신 중이던 효제동 이혜수의 집을 일경 수백 명이 에워싸자 홀로 대치한 끝에 일경 수 명을 쏴죽이고 장렬히 자결 순국했다. 설날 당일이 바로 김상옥 의사 서거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서 차마 뵙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5시간가량 종횡무진 했던 서울 나들이, 평생 잊지 못할 뜻깊은 설날 기행이 될 것 같다.

 

▲ 서울대병원 내 지석영 동상 (사진=신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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