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답사방 기행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3/05/22 [06:49]

화개답사방 기행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3/05/22 [06:49]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을 앞두고 지리산 둘레 마을들을 찾아보았다. 참고로 지리산은 경남 산청군·하동군·함양군과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세 개의 도와 다섯 곳의 지자체로 둘러싸여 있다. 이 중 일정상 경상도 지역 세 곳만 1박 2일로 둘러 보았다. 총 7명의 답사객으로 구성된 일명 ‘화개답사방’(방장 김성태) 기행이다. 주요 코스는 ①산청 남사예담촌-②산청 남명기념관-③하동 이병주문학관-④하동 화사별서/박경리문학관-⑤하동 쌍계사/칠불사-⑥하동 차엑스포 & 섬진강 평사리공원-⑦산청 동의보감촌-⑧함양 상림공원이다.

 

첫날_5월 19일(금)

 

1코스_산청 단성면 남사예담촌

아침 6시에 군포시청 앞에서 출발, 11시경에 산청 단성면 ‘남사예담촌(등록문화재 제281호)’에 도착했다. 마을 이름에 ‘예담(=아름다운 담장)’을 붙였을 정도로 아름다운 토담과 돌담으로 마을 전체가 고풍스러우면서도 빼어나다. 조선시대 이후 성주이씨, 밀양박씨, 진양하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로, 훌륭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하여 양반고을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이 마을 윤씨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고, 고려말 정당문학(政堂文學, 국가행정을 총괄하던 관직)을 지낸 통정 강희백을 비롯,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른 경재 하연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이곳에는 1392년(태조 1) 이성계가 개국일등공신 이제(李濟)에게 내린 개국공신교서비(開國功臣敎書碑)가 세워져 있다. 이제는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셋째딸 경순공주의 남편이 되었으며, 흥안군에 봉해진 뒤 여러 요직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올랐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되었다. 조준, 배극렴 등과 함께 내려진 교서는 가로 94.5㎝, 세로 32.5㎝이며 현재 이제의 것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개국공신교서이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보로 지정,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원철 원장 부부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마을 뒷산은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취푸의 산에서 이름을 딴 니구산(尼丘山)이고, 마을 주위로는 사수(泗水)가 흐르고 있다. 경남 문화재자료로는 ‘최씨고가’, ‘이씨고가’, ‘면우곽종석유적’, ‘사양정사’가 있으며 그 외에 마을의 상징수인 수령 약 300년 된 회화나무와 600년 된 감나무, 700년 된 매화나무 등의 노거수가 있다. 일행은 영화 <왕이 된 남자> 촬영지였다는 회화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인근 별미식당 <남사별곡>에서 국수와 파전, 막걸리로 요기한 후 시천면 남명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2코스_산청 시천면 남명기념관

시천면은 ‘화살 시(矢)’처럼 물살이 빠른 하천을 끼고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가까이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 대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의 서당인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경상도 삼가현 토골[兔洞]에서 태어났으나 만년에 평소 갈고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노년을 보낸 곳이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 사림의 중심이 되었고 임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의 선봉에 섰다. 동갑내기였던 퇴계 이황이 이론 정립에 매진하였다면 남명은 실행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그를 따랐던 제자 - 정구, 곽재우, 오건, 정인홍, 이제신, 김효원, 강익, 최영경 등 - 에 의해 오늘날까지 남명학파가 이름을 떨치고 있다. 기념관 내에는 ‘단성소국역비(丹城疏國譯碑)’가 세워져 있다. 명종 10년(1555) 당시 국정 문란을 질타하는 상소문에 왕을 ‘고아’라 하고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궁중의 일개 ‘과부’라 하여 조정과 사림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강직한 ‘경의(敬義)정신’을 손수 지은 졸시 한 수로 표현해 본다.

 

“안으로 마음 밝힘은 경(敬)이요/ 밖으로 결단 내림은 의(義)일세// 불 속에서 서슬 퍼런 칼날 뽑아내니/ 서릿발 칼 빛이 달을 치고 흘러/ 견우 북두 넓디넓은 하늘에/ 정신줄 놓아도 칼날은 놓지 않으리// 감악산 계곡물에 온몸의 허물 벗겨/ 맑은 못 천 섬 물로 다 씻어낼까만/ 혹여 오장에 한 줌 티끌이라도 생긴다면/ 그 즉시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 끼니를 채울 먹을거리 없다 해도/ 십리 길 은하(銀河)는 먹고도 남아/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저 산 아래/ 태산이 벽립(壁立)하도록/ 품은 칼을 갈고 닦으리” -남명(南冥)의 칼 전문-

 

  우암 송시열의 신도비 에서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 등을 차례차례 둘러보고 여재실(如在室, 문중에서 제를 올리는 가묘) 뒷산에 자리한 선생의 묘소도 참배하였다.

 

3코스_하동 악양면 이병주문학관

산청군에서 하동군으로 넘어가며 본 기행을 기획 준비했던 김성태 박사(고고학 전공)의 목소리가 점점 밝아진다. 이곳 악양면이 그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당초 정규 일정에 없었던 이병주문학관을 은근슬쩍 집어넣는 꼼수를 부렸지만, 일행들도 질세라 만장일치 동의했다. 

 

이병주(1921~1992)는 이곳 악양면 출생으로 1941년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 와세다대 불문과에서 공부하다 학병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중퇴했다. 광복 후에 귀국하여 진주 농대(1948), 해인대(1951) 교수를 지냈고, 『국제신보』 주필(1955)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5년 7월 『세대』에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보기 드문 지적 문체와 듬직한 역사의식 및 폭넓은 소재로 해서 등단 수년 만에 작가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교육계/언론계에 종사하던 그가 40대 중반에야 뒤늦게 소설가로 등단, 문단 활동 27년 동안에 장편과 작품집만도 60권 넘게 발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변명」에 밝힌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과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개인적 문학관처럼 그의 필력은 육중하고 장중하다. 그런 연고로 평론가들은 그를 ‘한국의 발자끄’라 칭송했다. 이날 강당에서는 지역 문인들의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강당 입구 책장에는 지역 문인들의 작품집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하길래 이환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뒷주머니에 훔치듯 쑤셔넣고 돌아섰다.

 

4코스_하동 악양면 화사별서/박경리문학관

첫날의 마지막 코스이자 피날레랄 수 있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섬진강 길을 끼고 펼쳐지는 넓은 전답과 소설 속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인 화사별서, 박경리문학관 등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서다.

 

  화사별서 에서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화사별서(花史別墅). 그런데 장거리 운전의 피로감이었는지, 늦은 오후로 접어들어서인지 가이드 겸 운전기사 1인 2역을 담당한 김 박사가 찾아가는 길을 헤매는 바람에 산골짝에 위치한 별서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별서 문을 들어선 순간,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황홀경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닐 정도로 별서는 이름처럼 화사했다. 악양면 정서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직계 손인 조재희(1861~1941)가 낙향하여 지은 가옥으로 본인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였고 건물을 짓는 데만 총 16년이 걸렸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랑채, 행랑채, 초당, 사당 등이 불타 없어졌지만, 안채 등의 원형은 잘 보존되고 있다. 원래 별서(別墅)는 ‘농장 근처에 짓는 농막’이란 뜻이지만, 이곳은 조선말 상류층의 별장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지면서 유명해졌다. 이곳은 김 박사의 외가와 관련이 있고, 방문한 시간에 마침 후손 조한승 옹(98세)과 손자 분이 직접 안내까지 해줘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설명 중에 집에서 정확히 동·서로 5리 거리에 섬진강이 있는데 서쪽 사이에만 천석꾼이 있었고 동쪽 사이에는 없었다는 사실, 안채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도난당한 사실, 집을 지을 때 깊게 사각형 연못을 판 후 연못 위쪽에 천연 석빙고를 갖춘 사실, 1921년 회갑연 때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는 사실 등 기이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 근처의 박경리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 아래에는 소설 배경의 최참판댁 세트장과 서희 길상 등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딴 식당과 카페, 옷가게 등이 즐비했으나 눈 구경만 간단히 하면서 문학관에 들어서니 책을 펼치고 서 있는 박경리 동상이 우릴 반긴다. 여기는 원주나 통영 문학관과는 달리 모든 전시가 소설 「토지」에 맞춰져 있다. 25년에 결친 소설 집필 때 사용된 만년필과 원고지, 안경, 돋보기, 국어사전 등이 펼쳐진 가운데, 「토지」 1부 자서에 남긴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 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던 것이다”라는 대목은 작가입네 활동하는 나를 숙연하고도 부끄럽게 만든다. 박경리의 시 「눈먼 말」로 그녀의 작가 혼을 대신한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해 저무는 평사리를 뒤로 하고 숙소가 있는 쌍계사 입구로 향했다.

 

쌍계사 입구 근처 청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더덕구이와 표고버섯전, 파전, 감자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니 모든 피로가 싹 가신다. 그제서야 일행들과 격의 없는 대화도 나누었다. 시흥문화원 정원철 원장님의 부인은 경기민요 전수자이고, 양훈도 선생은 대학에서 북한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이진복 군포시민신문 발행인의 부인 정혜선 박사도 일본학 전공의 대학교수라서 나만 빼곤 다 박사급이다. 그래서인지 유익한 말들이 많이 오간다.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술의 힘을 빌리니 만사가 편하다. 화장실 벽에 걸린, 김용길 동아일보 기자가 썼다는 <권주가> 시화에서 용기를 얻는다. “일용할 노동 마칠 때마다/ 마땅히 들이킨 한 사발/ 삼십년 막걸리의 배 탔더니/ 깊은 밤 출렁거리는 꿈/ 잎이 돋고 생이 열린다” 내일 일정도 있고 해서 짧은 술로 자리를 마감했다.

 

이튿날_5월 20일(토)

 

5코스_하동 쌍계사/칠불사

5시경에 눈을 떴다. 간단히 씻고 6시가 되기 전 쌍계사에 올랐다. 아침 식사 전에 불기(佛氣)를 얻어오기 위해서다. 화개면 지리산에 위치한 쌍계사(雙磎寺)는 통일신라 723년(성덕왕 23)에 의상의 제자였던 승려 삼법이 창건한 사찰이다. 조계종 제13교구 본사로서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을 때 꿈속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지었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했고,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신산 쌍계사 일주문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 응진전, 노전, 청학루, 명부전·팔상전, 적묵당, 설선당, 나한전·육조정상탑전, 천왕문·금강문·일주문과 대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로 지정된 진감선사탑비, 보물로 지정된 승탑과 팔상전 영산회상도,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등과 불경 목판이 있다. 대공탑비는 885년 헌강왕이 입적한 혜소(慧昭)에게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추증,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어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887년(진성여왕 1)에 완성되었다. 비문은 최치원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이밖에도 육조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경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아자방(亞字房)의 터가 있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났다는 천년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고, 원효와 의상이 도를 닦은 이후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러서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함께 간 김 박사가 첫날과는 달리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줘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설명 중에 “고고학을 전공한 사학자는 땅을 파내어 들춰보는 특성상 탑을 보더라도 단순히 눈에 뵈는 탑신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탑 아랫부분까지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어서 훨씬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자랑한다. 해박한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려와 하동의 명물 재첩국으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인근 칠불사(七佛寺)에 올랐다. 붐비기 전에 차 엑스포 행사장을 구경하려 했으나 10시가 되어야 입장이 된다기에 남은 1시간 이상을 메우기 위한 미봉책으로 찾은 것이다. 이곳 역시 쌍계사에 못지않은 명찰이기에 안 가보면 서운할 곳이다. 창건 연도가 확실치 않으나,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수로왕에게 아들이 10명 있었는데, 한 사람은 태자가 되고 두 사람은 어머니인 허황후의 성씨를 잇게 했다. 나머지 7명은 속세와 연을 끊고 외삼촌인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수도할 것을 결정, 이곳 칠불사에 정착해 정진한 지 6년 만에 정각 성불했다. 수로왕은 60년간 태평성세를 이루고 이곳에 대가람을 창건, 불법을 크게 흥하게 했다. 효공왕 대에 이르러 금관(현재의 김해)의 승려 담공 선사가 이 절에 와서 벽안당 선실을 亞자 형의 2중 온돌방으로 축조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아자방(亞字房)이다. 한 번 불을 지피면 여러 날 보온이 되었다는 불가사의한 공법으로 인해 『세계건축사전』에 올라 있다. 

 

아자방은 동국제일도량으로 널리 알려지며, 화현 설화 등 많은 설화와 함께 역대에 무수한 도인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의 대선사인 청명화상(淸明和尙)을 비롯, 조선 중종 대의 조능선사(祖能禪師) 등이 대표적이다. 임란 때 불탔으나 사제 관계인 금담율사(金潭律師)와 대은율사(大隱律師)가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아 1830년(순조 30) 소실된 가람을 완전 복원시켰다. 그 후 칠불사의 명성이 높아져 초의선사(草衣禪師)도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했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퇴락하였던 당우들을 서기룡 화상이 중수했으나, 1949년 지리산 전투의 참화로 완전히 불타 버렸다. 1965년 이후 제월 통광화상(通光和尙)이 행각을 하다가 잿더미가 된 유적을 보고, 중창 복원을 기약하며 발원했다. 정부의 협조하에 1978년부터 15년 이상의 장기간 복원 불사가 진행됐다. 아쉽게도 우리가 간 날도 대대적인 아자방 공사가 이뤄지고 있어서 경내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탱화 등 그림 전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서운함을 달랬다. 

 

6코스_하동 차 엑스포 & 섬진강 평사리공원

칠불사에서 내려와 차 엑스포 행사장에 들어선 시각이 10시 반경. 12시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제일 먼저 전시관을 구경했다. 하동 차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828년 흥덕왕 3년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차를 예찬한 시들이 몇 점 걸려있었는데, 이 중 추사 김정희가 지었다는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라는 시도 있다. “쌍계사 봄빛, 오랜 차 인연/ 제일가는 두강차는 육조탑 아래에서 빛나네/ 늙은이 탐냄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하여/ 입춘에 다시 향기로운 김 보낸다고 약속했네”추사가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쌍계사 만허 스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차에 대한 보답으로 지은 시라고 소개하나, 확인차 검색해본 네이버에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분 중 이를 해명해 줄 자료가 있다면 속히 알려 주시기 바란다. 밖으로 나와 부스를 한 바퀴 돌았다. 가는 곳마다 무료 시음 행사를 해서 한 바퀴 돌다 보니 물배가 가득 찼다. 도중 ‘서희블랜딩티’ 5봉지를 샀다. 호박 사탕무 옥수수 우엉 루이보스 차 레몬밤 등 8가지 재료로 만들어져 숙변해소 뱃살제거 독소제거에 탁월하다기에 같이 간 일행들에게도 한 봉지씩 선물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날씬해진 몸매로 만나길 바라며... 돌아서 나오는 길에 차 사료로 양식한 참숭어회 무료시식 행사가 열리길래 줄을 서서 먹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비린내도 없고 육질이 찰지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이래저래 몸에 좋은 차 재료로 파생된 기발한 상품들이 많이 개발되어 하동 차 산업에도 큰 보탬이 되길 바랐다.

 

 하동 차 엑스포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행사장을 빠져나온 뒤 산청 쪽으로 가는 길에 김 박사의 제안으로 섬진강변 모래가 장관인 평사리공원에도 잠시 들렀다. 시비(詩碑)가 여럿 세워져 있고, 지명 유래비도 있어서 읽어보니 삼국시대(신라) 때 하동군을 ‘한다사군’이라 했다고 한다. 이 명칭의 ‘다사’에 귀여운 어감의 ‘돌’을 붙여 이후 ‘다사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들 일어서기를 주저했으나 아직 갈 곳이 남아 있었으므로 걸음을 재촉했다.

 

7코스_산청 동의보감촌

왕산과 필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동의보감촌은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한방테마 건강체험 관광지로서,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명실상부한 한방휴양 관광지의 메카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힐링여행지이다. 그런데 엑스포주제관은 휴관 상태이고,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유랑극단의 의술극(?)이 펼쳐지고 있었으나 왠지 길거리에서나 봄 직한 약장수 수준이다. 근처 식당에서 한약재 육수로 우려낸 국물 요리로 늦은 점심을 먹고는 이번에도 일정에 없던 함양 상림공원으로 향했다. 김 박사의 순발력이 대단하다. 물론 이곳의 지형을 잘 알아서였겠지만 적재·적소·적시의 순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여기며 차에 올라탔다.

 

8코스_함양 상림공원

함양 상림(上林)은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이곳 태수로 부임해 조성했던 숲으로 전해진다., 1962년 12월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면서 시설 설비를 확충해 오늘에 이른다. 상림공원은 연장 1.6㎞에 폭 80~200m, 총 210,000㎡의 면적에 조성되어 있다. 공원 입구에는 1792년 함양군 안의면 현감으로 부임한 박지원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조선시대 최초로 도입한 물레방아가 있고 연못과 사운정, 화수정, 초선정, 연꽃단지 등 5개의 호수가 숲과 어우러져 있다. 숲 가운데에는 역사인물공원이 조성되어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좌우에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과 실학파의 핵심 인물인 연암 박지원, 영남 유림의 중심 점필재 김종직, 구한말 호남 의병대장 의재 문태서 등 함양의 역사적 인물 11명의 흉상을 설치해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경남 문화재로는 이은리 석불, 함화루, 최치원 신도비, 척화비 등이 있다. 그 외에 야외무대인 다볕당과 공원 내 산책로를 따라 금호미다리, 지압보도 등과 음악분수대가 조성되어 있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인공수로 길가에 ‘쳔년약속 사랑나무’가 있다. 보기 드물게 뿌리가 다른 두 나무(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연리목(連理木)이 연인들의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수고하신 김 박사와 동행했던 일행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미담 한 토막을 소개하며 기행 감상기를 접고자 한다. 

 

 함양 상림의 연리목 (사진=김성태)   © 군포시민신문

 

이번 기행에 같이 한 시흥문화원 정원철 원장의 부인은 몇 년 전 의료사고로 수족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었다. 매일 아내의 손발을 주물러주고 물리치료로 걷기운동을 함께 한 지가 한참 되고도 별 차도가 없자 부인은 “서로 힘드니 나를 떠나시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정 원장은 “떠날 거 같으면 진작 떠났지, 앞으로는 그런 말 일절 하지 말라”며 지금도 지극정성 부인을 돌본다고 한다. 두 사람을 아는 분들 사이에서 ‘잉꼬부부의 표본’, ‘순애보적인 사랑’이라 부러워할 정도라니 일면식이 별로 없던 나로서는 앞으로 두 분을 자주 지켜보며 부부애의 정석을 익히고자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부부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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