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리영희 발자취 기행, 한국동란 당시 강원도 최전방을 가다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기사입력 2023/10/26 [07:06]

제4차 리영희 발자취 기행, 한국동란 당시 강원도 최전방을 가다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입력 : 2023/10/26 [07:06]

10월 24일 화요일 오전 7시 30분, 군포시청 앞에 40여 명의 기행단이 모였다. 리영희기념사업회 대외활동분과(분과장 박미애)와 군포시 민주시민교육센터(센터장 강선영)가 공동주관하는 제4차 리영희 발자취 기행에 나서기 위해서다. 한 사람의 지각이 있었지만 10분가량 지체한 뒤 대절버스는 시내를 빠져나갔다. 참가인원을 점검해보니 정확히 42명이다. 하루 먼저 가 있는 일행 한 사람을 포함하면 총원 43명이 찾아가는 곳은 강원도 고성 건봉사와 설악 신흥사, 양양 낙산사 세 곳의 사찰이다. 리영희 선생과 어떤 사연이 있길래 멀리 강원도, 그것도 사찰만 골라 기행에 나선 걸까. 그 진상의 꼬리를 밝혀 본다.

 

프랑스 르몽드지가 ‘사상의 은사’라고 칭송했던 언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고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공고(현 서울공고)를 거쳐 해양대를 1950년 3월에 졸업, 안동중 영어교사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해 6월에 한국동란이 터지자 3개월간의 교사생활을 접고 통역장교로 입대한다. 약식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부대는 11사단 9연대, 빨치산 토벌대였던 이 부대는 1951년 2월 719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자행했던 부대였으나 미 고문관 통역 업무만 수행하는 그는 뒤늦게야 만행을 알게 된다. 이 여파 탓인지 같은 해 하반기 강원도 동부 최전방으로 전속된다. 앞서 언급한 세 곳의 사찰은 당시 밀고밀리는 전장에서 국군 연대의 임시본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기상으로는 신흥사-낙산사-건봉사의 순이나 효율적 기행을 위해 강원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는 코스로 이동했다.

 

버스 안 함경도 사투리 퀴즈

낯선 얼굴이 많았다. 이럴 땐 분위기를 돋우는 퀴즈게임이 몸풀기엔 적격이다. 지난 기행 때 선생의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 퀴즈가 반응이 좋았으므로, 이번엔 함경도 사투리를 준비해 보았다. 함경도 사투리의 특징은 어미가 ‘~둥, ~지비, ~꾸마’로 끝나는 동사가 많고, 낱말도 두만강 너머 만주어 등의 영향을 받아 서울 표준어와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사지선답형 퀴즈를 낸 결과, 절반 정도는 정답만 못맞춰 남은 어부지리 정답은 무효처리시키는 불상사(?)가 연출되었다. 예를 든다면 함경도 말로 ‘쉰쇠’, ‘제짜불싸’, ‘들뿌리’, ‘혼소바루’가 무슨 뜻일까.

- 쉰쇠: ➀노총각 ➁재혼 ➂예단 ➃선생님

- 제짜불싸: ➀비스듬이 ➁다소곳이 ➂째려보듯 ➃갈팡질팡

- 들뿌리: ➀양말 ➁팬티 ➂스타킹 ➃버선

- 혼소바루: ➀넓은마루 ➁똑바로 ➂헐레벌떡 ➃혼자서  (정답은 맨 뒤에)

같은 중국 땅에서도 동서남북으로 갈라치면 언어소통이 안 될 지경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으나, 작은 한반도 내에서도 방언의 정도가 이 정도라니 놀랍기도 하고 하루빨리 서로 교류하여 언어만이라도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오지탄광 할 때 ‘아오지’는 ‘아우라지’ 또는 ‘두물머리’의 뜻이라서 그곳을 가보게 된다면 두 하천이 합쳐서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고성 건봉사 대웅전 앞(사진=한재수)  © 군포시민신문

 

제1착 고성 건봉사(乾鳳寺)

오전 11시경에 도착한 건봉사는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서 휴전선 이남 중 최북단 사찰이다. 건봉사는 6.25 전쟁 때 미군 폭격기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뒤 1994년부터 전소된 가람들을 복원하면서 차츰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520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에 의해 '원각사(圓覺寺)'가 창건,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사찰을 중수하여 '서봉사(西鳳寺)'로 개칭했고, 1358년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화상이 다시 한번 사찰을 중수하여 지금의 '건봉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왜군이 양산 통도사에서 훔쳐 간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도 일본에서 되찾아와 이곳에 봉안했다. 세조가 원당(願堂, 왕실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삼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한 이래로 한반도 전역을 통틀어 4대 사찰의 한 곳으로 부흥했으나 1878년 큰불로 3,183칸이 전소되는 참화를 겪었다. 이후 복구를 계속해 일본강점기 때는 9곳의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나, 6.25 전쟁 때 1920년에 세워진 불이문(不二門)을 제외한 대부분 건물이 전소되었다. 

 

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 275~282페이지에 전하는 일화로는, 인민군을 제압한 뒤 퍼트넘 소령과 함께 폐허가 된 사찰 경내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한 스님이 나타나 “종교를 싫어하는 인공치하와 달리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이라고 믿었던 국군들이 사찰 창고의 식량을 몽땅 훔쳐갔다. 식량만 되찾으면 혼자 남아서라도 끝까지 절을 지키며 살다 죽을 생각이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즉시 상부에 보고했지만 스님의 요청은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았던 그 스님도 절을 떠나버렸다는 일화이다. 선생은 “그 스님의 사라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나의 신념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한 시간가량 진신치아사리, 일제시대 사찰사진, 적멸보궁, 만해시비, 사명대사거적비 등을 둘러보고 인근 <건봉막국수>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면을 즉석에서 뽑아 삶아내는 막국수가 별미였지만, 양이 좀 적다는 불평에 대한 보상으로 식당 주인은 일행 수만큼의 사과즙을 후식으로 선물해 주었다. 2% 부족했던 음식 인심을 시골인심이 달래줬다고나 할까. 시작이 괜찮은 오전 일정이었다.

 

  신흥사 남북통일 청동좌불상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제2착 설악 신흥사(新興寺)

단풍이 절정에 달한 때라 사찰 주차장 전방 2~3km 지점부터 가다 서다가 반복되었다. 1.7km 지점에서 버스 기사의 제안으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원조 사찰터에서 향성사3층석탑을 만나고 단풍이 짙게 물든 풍광을 둘러보며 걷는 길이 오히려 호사스러웠다. 신흥사는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던 향성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나 49년 후인 701년(효소왕 10)의 화재로 없어졌다. 그 뒤 의상조사가 현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를 다시 세워 불법을 전하다가 인조 20년(1642)에 화재로 없어져서 2년 뒤 영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현 위치에 중건하고 신흥사(神興寺)라 이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1912년부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건봉사가 민통선 이북지역에 위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자 1971년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되었다. 1995년 ‘새롭게 부흥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절의 한자 이름을 신흥사(新興寺)로 변경했다.

 

이곳은 설악관광의 메카로 알려져 있으나 리영희 선생에겐 가슴 아픈 일화가 담겨있다. 1951년 처음 이곳을 연대본부로 삼았던 때다. 산사의 겨울 추위는 혹한 그 자체여서 군인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불을 땠다. 추위를 피하려 불 가까이 다가갔더니 불경 목판을 쪼개어 불을 때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보고 아연실색, 부연대장에게 곧바로 달려가 불경 훼손을 중지시키도록 요청해 불태워지지 않은 나머지 경판들은 다시 판고(版庫)로 옮겨져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아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경전들은 다라니경, 법화경, 부모은중경 등 한글+한자+범어 세 언어로 새겨진 매우 귀중한 불교 문화재였다. 현재 은중경만 온전하게 보존되고 나머지 경판들은 일부 훼손된 채 사찰 내 유물전시장에 보관되고 있다. 여기에도 범종의 총탄 자국 등 한국전쟁의 상처가 남아있지만, 사찰 입구에 세워진 동양 최대 크기의 청동좌상은 설악산을 마주하고 울산바위를 등진 채 통일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기원을 말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낙산사로 향하던 도중 참가자들에게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군포 외에도 안양, 과천, 안산, 서울 심지어는 멀리 여주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다. 사실 버스 만석을 초과한 세 분에게는 참가비를 되돌려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깊은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낙산사 의상대 앞 (사진=한재수)    © 군포시민신문

 

제3착 양양 낙산사(洛山寺)

오후 3시 반경에 도착한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리던 중 바닷가 굴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 염주를 건네주며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에 절을 지으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관세음보살이 있는 곳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신라 헌안왕 2년(858)에 범일대사가 중창했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화재 이후 크고 작은 화재가 잦았다. 2005년 4월 4일 난 큰 산불이 5일 오전 낙산사로 번져 사천왕문, 보타전, 의상대, 홍련암을 제외한 모든 전각뿐만 아니라 종루가 불타서 종을 덮어버리는 바람에 보물 제479호 동종이 녹아 소실되었다. 화재 당시 녹아내렸던 동종은 낙산사 안 의상대사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유독 화재가 빈번했던 낙산사는 혈 자리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봉황이 날아들었다는 길지(吉地)이기도 해서 동해의 아침 해를 가장 먼저 품을 수 있는 의상대와 홍련암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선생이 묵을 때의 전란 상황에선 군인들의 욕정을 채워주는 방공호 속 위안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성욕은 인종을 가리지 않아 한 미군장교의 여자공수 사건으로 결투 신청까지 하게 되는 에피소드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는 따스한 햇볕과 상쾌한 바닷바람이 그때 일을 잊으라 속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강원 최전방에서의 교훈

한 마디로 ‘야만’과 ‘부조리’에 대한 자각의 태동기였다. 전쟁통에 벌어진 온갖 약탈과 뺏고 빼앗기는 땅따먹기, 사병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고서는 태연하게 후방 본부에서 도장을 파던 지휘관, 스펙 쌓기 차원에서 잠시 최전방부대를 잠시 다녀간 빽 있는 김 소위, 소총을 들고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학력은 고작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무지랭이들, 마등령고개에서 천 길 계곡으로 떨어져 죽은 군인, 전투 중에 맞이했던 동생 명희의 죽음 등 여러 군상과 사건의 틈바구니에서 선생은 시시때때로 상념과 고뇌에 젖는다. 우리에게도 젊은 날이 없었던 게 아니지만, 선생의 젊은 날은 유달랐다. 사선을 넘나들며 훨씬 단단해지고 굳어진 정신무장은 훗날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되기에 충분해서다. 전쟁터에서 알게 된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나는 진리(眞理)를 사랑했다”는 묘비명으로 평생 자신을 채찍질했으므로 5.18묘역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세인들이 이런 글귀를 남겼다. “이성의 붓으로 진실(眞實)을 밝힌 사람, 리영희”로 말이다. 아침 7시 반부터 밤 9시까지 짧지 않은 당일치기 여정이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대 상황에 죽비을 맞고 온 매우 뜨끔하고도 소중한 발자취 기행이었다. 수고하신 관계자 참석자는 물론, 기행 현장에서 본회 회원으로 가입해 주신 몇몇 신입회원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P.S 퀴즈 정답: 쉰쇠=예단/제짜불싸=비스듬이/들뿌리=팬티/혼소바루=똑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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