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초막골과 철쭉동산 묘역

5월 군포 답사-초막골 묘역 편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4/05/20 [05:31]

[답사기] 초막골과 철쭉동산 묘역

5월 군포 답사-초막골 묘역 편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4/05/20 [05:31]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 강원도에는 때늦은 눈이 내리기도 했다. 이튿날인 16일 오후 2시,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초막골 초록주차장에 삼삼오오 20여 명의 답사 일행이 모여들었다. 지난 4월 수리사 일대를 시작으로 이번 2번째 향토사 답사기행이다. 이번에는 초막골 일대에 묻힌 묘역을 답사한다. 초막골 인근 묘역은 시대순으로 ➀윤효동(여말~선초) 묘 -> ➁안의(1423~1468) 묘 -> ➂한치의(1440~1473) 묘 -> ➃이기조(1595~1653) 묘로 이어진다. 코스별로 간단히 소개하면,

 

윤효동(尹孝童, 여말~선초) 묘

이곳을 제일 먼저 찾은 이유는 초막골에서는 가장 먼저 조성된 묘역이어서다. 묘표에 새겨진 ‘配 淑人文化柳氏合葬 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坡平尹公諱孝童之墓’ 글귀를 봐서는 부인이 조선 시대 정3품 당하관 또는 종3품의 아내인 외명부(外命婦) 품계인 ‘숙인’, 본인이 문관의 정3품 당하관 품계인 ‘통훈대부’에 오른 사헌부감찰 경력의 세도가이다. 그는 조선 초기 이곳 일대의 땅을 모두 소유할 정도로 권세나 재력이 뛰어났다. 문제는 무남독녀인 딸을 이곳의 세거집안이 된 순흥 안씨 참판공파 안의에게 시집 보내며 이 땅의 소유가 순흥 안씨 집안으로 넘어갔다. 이런 연유에서 지금도 윤효동의 시제를 순흥 안씨 참판공파에서 지내고 있다.

 

 안의 묘역 앞에서 (사진=이금순)   © 군포시민신문

 

안의(安誼, 1423~1468) 묘

순흥안씨 11세 참판공파 파시조 안의는 처가 땅이었던 이곳에 사망 후 세장(世葬)되었다. 그는 세종 때 명신인 안숭선의 둘째 아들로서 음직으로 나아가 성주목사, 연안부사 등을 지냈다. 이곳 가족묘에는 안의의 장자 12세 안우삼(1441~1494)도 함께 입묘되어 있으나, 그의 배우자 청주한씨의 아버지 한계미의 묘가 경기 고양에 있고, 안우삼의 장자 안희의 묘가 파주 공릉에 있으며, 파주의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의 외손임을 고려할 때 단순한 입묘 수준일 뿐 14세 안흥인 이후에 가서야 실질적으로 군포로 입향, 세거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치의(韓致義, 1440~1473) 묘

청주한씨 장도공파가 군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공평공 한위(韓偉, 1465∼1511)가 안우삼의 사위가 된 것이 계기다. 한위의 조부는 장절공 한확이고, 부친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동생으로 장도공파의 파조인 한치의이다. 자헌대부병조판서청양군(資憲大夫兵曹判書淸陽君)에 봉해진 그의 묘는 본래 경기 광주 학당리(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었으나 그곳에 선릉(성종 묘)이 조성되면서 한 차례 이전되었다가 1970년 이곳 초막골로 옮겨졌다. 이곳에 처음 묘를 쓴 이는 그의 부인 전의 이씨로 수리산 아래 소문리(蘇門里)에 묻혔다. 이는 아들 한위가 안우삼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이곳 순흥안씨 묘역에 묘를 쓰게 된 것이다.

 

이기조(李基祚, 1595∼1653) 묘

조선 중기의 문신 한산이씨 호암 이기조 묘소는 1990년 4월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광해군 7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으나,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효종 5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 13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낼 때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묘지는 부인 고령신씨와의 합장묘이다. 묘역 앞에는 숙종 31년(1705)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는데, 박세채가 글을 지었다. 산본동 산16에 위치해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 1992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장할 때 발견된 묘지석의 내용에 근거해 원래의 묘역을 영조 4년(1728)에 이장해 만들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2시간 반가량의 묘소 순례가 모두 끝났다. 해설을 맡아준 이진복 박사(현 군포시민신문 발행인)와 나각순 박사(전 서울시편찬위원회 위원 역임) 두 분의 자세하고도 해박한 설명 덕분에 우리 지역 세거 집안 간의 혼맥 관계가 왕조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600여 년간 지켜 내려온 외손봉사(外孫奉祀, 직계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제사를 받느는 일)의 사례를 현장에서 확인한 것과 조선 숙종 대 이전까지는 ‘시집간다’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남자들이 ‘장가 드는’ 여존남비사회(?)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그 시대로 회귀하는 사회풍조가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건 나만의 불편한 느낌이 아닐 것이다. 행사를 준비해준 참자연교사회(회장 김현복)에 감사드린다.

 

 초막골 묘역 답사 참가자 (사진=이금순)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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