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이의 죽음은 산자의 인생 교과서다. 김민기 님이 어젯밤 지구별 여행을 마치고 북망산으로 떠나셨다. 오늘 아침 신문을 펼치며 ‘올 것이 왔구나!’ 먼저 북쪽을 향해 애도의 염을 고하고 명복을 빌었다. 작년부터 위암 말기로 완치가 어렵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스쳐가는 여행자들.” 내 25년 전 추억의 상자 속에서 김민기를 꺼내봤다.
1999년 4월 어느 날, 오사카의 밤은 뜨거웠다. ‘재일동포와 민족문화’라는 주제로 김지하 님 초청 강연이 있었다. 그가 복권되자, 오사카 ‘김지하 구명운동단체’에서 초청한 강연이었다. 그때 동행한 사람이 김민기였다. 강연은 성공리에 끝났고, 김지하, 김민기를 포함해 관계자들 십여 명이 오사카 뒷골목 이자카야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나도 준비위원 자격으로 동석했다. 술잔이 돌고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익어가자, 어느 일본인 노교수가 “김민기 선생님, 실례지만, ‘아침이슬’ 한 곡 불려 주실 수 있을까요?”라며 간청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뜨겁게 박수로 응수했다. 그런데 거나하게 불콰해진 김민기는 조용한 낮은 목소리로 “저는 노래를 못합니다.” 정중하게 사양했다. “가수가 노래를 못한다!” 분위기는 순간 의아하게 싹 변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결국 불똥이 김민기 옆에서 술을 마시던 나에게 떨어졌다. 김민기 님이 “안 선생님이 하시지요.” 그러자 나에게 박수가 날아 왔다. 이게 무슨 날벼락! 김민기 앞에서 ‘아침이슬’을 부른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나는 술김에 어쩔 수 없이 ‘아침이슬’을 부르고 말았다. 다음날 김민기 님는 “어젯밤 고마웠다”며 1995년 서울음반에서 제작한 <김민기 노래전집 CD 4장>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CD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며 잘 듣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가수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20대 전후 그저 일기를 쓰듯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일기를 다시 읽고 좋아할 사람 있겠냐?”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도 있다. 김민기 음반은 1971년, 스무 살 때 낸 LP <김민기> 한 장과 1991년 학전을 만들기 위해 인세를 선불로 받아 낸 <김민기 노래전집 CD 4장>뿐이다.
김민기는 한국현대사 문화현상에서 자타 공인하는 ‘한국저항문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자신만 부정한다. ‘아침이슬’도 이젠 자기 노래가 아니라고 겸손하게 부인한다. 어떤 방송사에서 “ 아침이슬이 국민가요가 됐는데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겨울내복 같은 거죠. 필요해서 입었지만 내복을 자랑하기엔 애매한 물건 아닐까요? ‘아침이슬’이 그렇습니다.”
김민기 노래는 서정성이 강하다. 담백한 수채와 같은 노래가 많다. 투쟁가로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대표곡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대부분 다 그렇다. 다만, 당대의 아픔을 은유로 표현한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다보면, 어떤 강한 메시지를 느끼게 한다. 그 핵심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고, 인권이고, 민중이고, 삶이고, 나눔이고, 희망이고 크게는 한민족 통일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김민기님은 “나는 운동권도 아니고, 운동권 노래를 만든 적도 없고, 시위 현장에 나가 내 노래를 부른 적도 없고, 정치적 구호를 외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노래 메시지가 시대와 맞아 떨어져 민중들이 시위 현장에서 부르다 보니 ‘민중가요’라는 틀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정태춘은 “김민기의 노래를 한 번도 누워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아침이슬’을 비롯한 김민기 노래는 이제 노래의 개념을 넘어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나의 20대, 30대 아니 지금까지 만약 김민기 노래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환경에서 무슨 노래를 부르며 청춘 시절을 지냈을까! 청춘 시절에 만난 김민기 노래는 내 젊음의 위로였고, 연민이었고, 희망이었다.
김민기 님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잘난 체하지 않고,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책임만 감수하는” ‘결 좋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민기 님의 애칭은 자타 공인 ‘뒷것’이었다. 평소 술자리에서 그는 “내 몸에서 나간 것이 백배가 되어서 되돌아오면 버겁다. 내 노래가 아직도 불리는 현실이 부끄럽다. 나는 ‘뒷것’이다.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마라”고 했다. 그는 나서길 싫어하고 요란한 행사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뒷일’을 자처하며 살았다고 한다. 도인의 삶이었다.
김민기는 은유로 시대를 노래한 한국의 ‘밥 딜런’이다. 노래로, 연극으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예술가였다. 나는 이제 우리가 고인이 된 김민기를 더 이상 ‘운동권 저항가수’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현대사의 영원한 청년으로, 문화 선구자로, 그리고 한국 노래문화사, 민중사를 이해하는 창과 거울 같은 예술가, 철학자로 기억하고 계승되었으면 좋겠다.
평소 말이 길지 않았던 김민기 님은 “말을 앞세워 공정과 정의를 주장한 적도 없었다. 묵묵히 아픔의 자리에 먼저 가 있었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먼저 몸으로 보여주었다. 멋진 폼 한 번 잡지 않았다. 물밑의 가치만 추구했다. 척박했던 시대를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셨다.” 이렇게 우리에게 빚만 지게하고 떠났다. 이제 우리의 남은 숙제는 ‘김민기 빚 갚기’다. 우리는 이제 당시 시대의 아픔을 늘 아침이슬과 같이 해맑은 웃음으로 극복해가며 사셨던 김민기 님의 미소를 기억하며, 이 어려운 시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지구별 약자들을 위해 묵묵히 실천하는 일뿐이다.
김민기 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 조화나 조의금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빈소를 채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절대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지 마라. 조의금, 조화도 받지 마라. 추모 공연도 하지 마라. 조문객에게 밥은 배불리 먹여라. 난 할 만큼 다 했다. 그저 다 고맙다”는 담백한 유언을 남기시고 연명치료 한번 받지 않고 순리대로 이번 생을 떠나셨다.
늘 쓸쓸한 외로움이 괴어있었던 김민기 선생님! 약자들과 어린이들을 좋아하셨던 티 없이 맑았던 김민기 선생님! 당신이 계셨기에, 당신의 노래가 있었기에 내 청춘은 아니 지금까지도 행복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겁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죽음은 한 생명을 살리는 철학이 된다. “밤하늘에 별 한 개가 더 반짝거리면 당신의 별이겠지요!” 사후까지 산 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기시고 가신 故 김민기 선생님! 부디, 북망산(北邙山) 한적하고 깊은 곳에 가셔서 못다 누린 인생의 호사 마음껏 다 누리십시오. 극락왕생을 빕니다.
편집자 주) 기고 글을 보내온 안준모 씨는 의왕에서 문화살롱 <라우리안>을 운영하는 음악애호가이자 설치미술가이다. 때마침 자신의 생일(7/21)에 맞춰 돌아가신 김민기 님과의 하룻밤 추억이 선생의 모범적인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위의 글은 7월 30일 군포지역 작가들이 마련했던 추모 행사에 동참하여 참석자에게 들려준 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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