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역사기행] 76년 전의 악몽 씻김굿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4/10/25 [06:11]

[여순사건 역사기행] 76년 전의 악몽 씻김굿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4/10/25 [06:11]

  씻김굿은 ‘액운이 있을 때 안 좋은 기운을 쫓아내는 굿’을 말한다. 특별히 전라남도 여수에서 멀지 않은 진도씻김굿은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하고 맺혀있는 한을 풀어 주어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2024년 10월 18일 오전 6시, 경기중부권(안양 군포 의왕)의 30여 시민들은 76년 전의 악몽을 씻어내려는 마음으로 여수행 장도에 올랐다. 

 

  악몽의 개요

 

  제목에 달린 ‘76년 전의 악몽’은 1948년 10월 19일 밤에 발발한 여순사건을 말한다. 사건의 발단은 그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이승만 정권이 5.10총선에 극렬히 반대했던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해 이곳 여수의 14연대에 제주파병 명령을 내리자 군인들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앞장서서 일으킬 수 없다며 출병을 거부하면서 벌어진 봉기(蜂起)이다. 사건 초기부터 군사독재정권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반란(反亂)’이란 딱지를 붙여왔지만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평가를 거치며 군사반란이 아니라 ‘군민이 합세한 봉기’로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곳 여수 사람들은 모두 다 본 사건을 ‘여순봉기사건’으로 부른다. 

 

  악몽같은 애가(哀歌)

 

  내려가면서 비가 오락가락했다. 76년 전 악몽에 희생된 원혼들이 비를 뿌리며 우리를 안내하는 형상이다. 여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대절버스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이날 해설사를 맡은 내가 마이크를 잡고 약간의 사전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여순10.19사건은 1946년 대구10.1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제주4.3사건에 이은 연장선상에 벌어진 대규모 군민봉기였다. 1945년 8월 15일 식민 상태에서 갑작스레 맞이한 광복은 미국과 소련의 남한 분할 군정(軍政)에다가 해외로 나간 사람들의 대거 귀환, 무정부 상태에서의 정치·사회적 혼란, 게다가 주식인 미곡관리 실패로 흉흉해진 민심 등으로 말미암아 해방의 기쁨은 금세 악몽으로 변해갔다. 오늘 우리는 그 악몽의 중심부로 간다”며 말을 아꼈다. 대신 여순사건이 자아낸 사연 담긴 노래들을 틀어주었다.

  《여수아화》는 처음으로 여순사건을 다룬 대중가요로 1949년에 취입된 남인수 노래다. 레코드가 취입되자마자 우리나라 대중가요 1호 금지곡이 되었다. 김초향이 쓴 가사를 잠시 들려주면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 집 선돌 아범 어데로 갔나요/ 창 없는 빈집 속에 달빛이 새어들면/ 철없는 새끼들은 웃고만 있네/(중략)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이다. 가사 마디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하고 당시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노래했음에도 노래를 금지시키며 노래를 따라부를 위안도 주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나온 《산동애가》의 가사는 슬프다 못해 가슴을 찢어 놓는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열아홉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지리산 노고단아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구례군 산동마을에 살던 19살 백순례(실명)가 세 오빠 중 홀로 살아남은 막내 오빠를 대신해 죽기(代殺) 위해 지리산 노고단으로 끌려가며 부른 노래이다. 당시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으로 숨어든 봉기군들이 마을로 몰래 내려와 밥을 훔쳐먹곤 했는데, 도움을 준 가정마다 한 명씩 사형장으로 끌려가야 했다. 집안의 대가 끊길 지경에 놓이자 여동생 순례가 오빠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참으로 가슴 저린 노래다.

  뒤이어 들려준 《울 밑에선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와 《부용산》(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역시 당시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 앞의 노래는 여수 14연대 봉기 이후 우익인사라는 이유로 처단된 김창업이 총살당하면서 부른 노래이고, 뒤의 노래는 진압군에 몰려 지리산으로 숨어든 봉기군들이 고향마을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불렀던 노래라서 극단적 이념과 사상이 부른 아픔과 참화가 배어난다.

 


  악몽의 시작

 

 

  1st 중앙동 인민대회장

  짧은 설명과 노래 감상을 하는 사이, 오전 11시를 갓 넘긴 시각에 버스는 여수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여수항 바로 앞의 이순신광장이다. 이곳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과 거북선 실물모형, 전라좌수영 본영인 진남관(鎭南館) 등 유서 깊은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여순 발발 이튿날인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 여수 시민이 대거 운집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그날 봉기군 측은 “38선이 남북으로 갈라졌다. 동포를 죽이라는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는 등의 성명을 발표한 뒤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6개 항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2nd 14연대 주둔지

  광장 근처에서 국밥으로 배를 불린 뒤 곧바로 당시 14연대 주둔지였던 신월동 805 일대로 달려갔다. 가는 사이 굵어진 빗줄기로 인해 버스에서 하차하진 못했지만, 이때부터 합류한 여수시 문화해설사 문서현 님의 설명은 빗소리를 잠재울 정도로 또렷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 해군이 202부대와 군수품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90% 정도 공정을 마친 상태로 해방되면서 빈 막사와 격납고만 남아있던 것을 1948년 5월 4일 14연대가 창설되면서 국방경비대가 병영으로 삼은 곳이다. 여순 사건 이후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한 뒤로 제15육군병원(1952/12/30~1953/7/27), 결핵환자 자활촌(1962/65/26~1976/2/20), 현재 화약을 제조하는 한화여수공장(1976/7/23~ )이 들어서 있다. 봉기 첫날 밤, 주동자 지창수 상사는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성명문에서 ➀동족상잔 결사반대, ➁미군 즉시 철퇴 두 가지 강령을 발표하며 2천여 명의 봉기군을 이끌었다. 바로 여수경찰을 제압하며 하루만에 여수시를 장악, 이튿날 순천으로 진격하며 세를 불렸고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수복할 때까지 교전을 펼쳤다. 

 

  3rd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교)

  진압군은 여수를 되찾자마자 여수 시민들을 이곳과 서국민학교 두 곳에 끌어모아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특히 이곳은 당시 여수경찰서와 인접한 이유로 계엄령 하에서 즉결재판만으로 사람들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당시 심사 기준은 이러했다. ➀교전 중인 자, ➁총을 가지고 있는 자, ➂손에 총을 쥔 자국이 있는 자, ➃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➄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➅머리를 짧게 깎은 자. 앞의 세 가지는 당연한 듯 보이나 나머지 세 가지는 심사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당시 천일고무에서 강탈한 지까다비를 봉기군에게 나눠주고 미군용 팬티를 보급하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고 하지만, 이런 불분명한 심사 기준에 하나라도 속하면 ‘손가락 총’만으로도 단번에 사형에 처했다고 하니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이 학교 뒤 언덕에 있는 여수여중은 당시 임시재판정으로 쓰여, 같은 해 10월 21일 우연히 부산항에서 진압군인들을 태우고 여수항에 입항했던 고 리영희 선생(당시 해양대 실습선에 승선 중인 학생이었음)도 그곳 운동장에 널려져 있던 시체들에 대한 소회를 자신의 책 《역정》에서 생생하게 밝힌 바 있다. 

 


  악몽의 흔적들

 

 

  4th 만성리 형제묘 & 희생자위령비

  용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좁고 긴 터널(사람손으로 파내어 만들어진 국내 최장터널)을 빠져나와야 만나게 되는 가파르고 외진 곳에 ‘형제묘’와 ‘위령비’가 위치하고 있다. 현지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종산국교 수용자 가운데 사형을 언도 받은 125명의 부역 혐의 지역 유지들을 1949년 1월 13일 이곳으로 끌고 와 25명씩 5그룹을 나눈 뒤 5명씩 차례로 총살한 후 차곡차곡 장작더미 위로 불태워 매장한 무덤이 바로 형제묘이다. 1948년 11월 13~14 양일간 수백 명을 용골 계곡에 던져 죽인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형제묘는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지내라’고 붙여준 이름이다. 유족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여수시가 뒤늦게 ‘형제묘’라는 비석을 세워주었으나 이마저도 뒷면에 새긴 글귀로 말미암아 피해를 볼까 봐 일부 유족이 뒷면 글귀를 감춰버린 채 남아 있다”고 했다. 이후 ‘골(골짜기)로 간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말로 대용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이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하는 내내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형제묘에서 약 50미터 거리에 있는 희생자위령비에 다다르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망자들의 눈물과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건이 지난 후 이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위해 작은 돌을 계곡에 던져넣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풍속이 한동안 지속되어 돌탑무덤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2009년에야 세워진 희생자위령비 뒷면에는 ‘......’ 말줄임표만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할 말은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무언의 항변이다. 근년에 세워진 네 개의 비문을 읽어보면 사건의 개요와 전개일지, 만성리 학살내용, 진상규명을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 등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으므로 여순사건 탐방 시 빠트릴 수 없는 필수코스이다. 이곳에서도 잠시 일동 묵념하고 비를 피해 성급히 버스에 올라탔다.

 

  5th 오동도 여순사건기념관

  가까운 오동도까지는 연육교가 놓여 있지만, 외부 차량에 대해서는 개방하고 있지않아 15~20분가량 걸어서 들어갔다. 1시간에 1대꼴로 동백열차가 운영되고 있긴 하나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기에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부 일행분의 요청으로 등대를 먼저 찾아갔다. 등대로 오르는 데크길 좌우로 동백나무가 무성하다. 제철이면 동백숲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비치는 낙화(落花)가 마치 땅에서 피어난 꽃처럼 장관을 이룬다 한다. 동백의 낙화마냥 오동도에서도 7백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등대를 뒤로하고 조금 내려온 곳에 소박한 규모의 ‘여순사건기념관’이 있다. 영상실 두 곳과 간단한 전시공간이 전부다, 중앙부처의 지원이 전혀 없이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관련 자료를 모으고, 시민추진위원회, 여수시청 여순사건지원팀 등 민관이 합세하여 지자체 비용만으로 세워진 탓에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여순사건의 진상을 드러낸 동영상들은 사건의 진실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후 3시 반경, 날씨가 개이지 않은 채 공식적인 여순사건 역사탐방을 끝내고 바다 건너 버스 주차장으로 걸어 나왔다. 

  버스에서 문 해설사와 작별하기 직전 남긴 그녀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여순사건 유적지를 돌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셨을 겁니다. 좌니 우니 하는 사상 이념과는 무관하게 손가락 총 하나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대량 살육당했습니다. 2021년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에 의거, 수천명의 유족들이 1차 배·보상을 신청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해당자는 겨우 0.9%에도 못 미쳤습니다. 애써 주검을 불태우고 수장(水葬)시키며 물리적 증거를 없애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의 죽음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말입니다. 이제는 정부가 적극 나서 진실을 규명하고 보상조치도 마련해주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여수 시민들은 제2의 봉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기념관에서 본 영상 말미에 “동백꽃은 세 번 피어난다. 겨울에 피어 봄을 준비하고, 이 땅에 떨어져 다시 피어나고, 우리 가슴속에 또다시 핀다”고 했다. 동백꽃이 지난 76년간 230여 차례나 서럽게 피고 진 것처럼 이제는 저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유족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여수 밤바다

 

  버스커 버스커가 부른 《여수 밤바다》는 그 감미로움으로 인해 외지인들의 로망이 된 지 오래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날 상경하는 버스를 배웅하고 남은 잔류파 4명은 하멜전시관과 낭만포차 일대를 배회하면서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렸다. 어둠과 함께 조명 불빛이 켜지던 시각, 우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생애 처음으로 여수 밤바다를 걸었다. ‘바다를 걷는다’는 은유적 표현이 실감이 날 정도로 여수 밤바다는 안온했다. 거친 파도도, 거친 물결도, 거친 해풍도 없이 고요한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낮에 문 해설사가 알려준 대로 여수 앞바다에는 무려 356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조밀하게 막고 있어서 여수 밤바다는 호수 같기 때문이다.

  이럴지니 여수 시민들의 심성은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럽고 순결했을 것이다. 게다가 산물이 풍부하여 여수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살림도 풍족했으나, 당시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고,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제주4.3사건 진압 명령마저 거부했던 것인데, 국가가 휘두른 폭력에 30곳이 넘는 지역에서 1만 명 넘게 추정되는 민간인이 희생된 ‘여순사건’은 한때의 비극만으로 치부할 순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전수조사, 보상조치를 통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희망과 상생의 미래를 열어야 하리라. 

 

  본 행사는 안양시의 후원 하에 경기중부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공동대표 문경식 박미애)가 주최하였으며 리영희기념사업회, 민주노총경기중부지부, 안양시민사회단체네트워크, 6.15공동선언실천경기중부본부 등이 협력단체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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