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역사기행기-3일차 퉁화/지안/환런/단둥동네 형님 두 분과 떠난 여행동네 형님 두 분과 아래의 일정으로 4박 5일간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성도이자 제1의 도시인 선양시를 시작으로 랴오닝성 제2의 도시인 다롄시 및 뤼순커우구에서 마무리했던 닷새간의 여행을 일정 순으로 기록해 본다.
일정: 10/11~12 선양(瀋陽)/랴오양(遼陽) - 10/13 퉁화(通化)/지안(集安)/환런(桓仁) - 10/14 단둥(丹東)/다롄(大連) - 10/15 뤼순커우구(旅順口區)
3일차(10/13, 일) 퉁화/지안/환런/단둥
통화역에 당도한 시각이 오전 6시 30분경, 역전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택시승강장으로 내려와 지안-환런을 경유해 단둥까지 갈 택시를 1,200위안(=24만원)으로 흥정해 대절했다. 1시간 가까이 달려 지안의 호태왕릉(광개토대왕릉)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풍경구(=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 호태왕릉-장수왕릉-환도산성 세 곳을 포함한 묶음입장료가 무려 70위안(=14,000원)에 달했다. 그런데 선양에서와는 달리 외국 관광객에게는 면제, 반값 룰을 적용해 주지 않았다. 환런에서의 고구려 유적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빌어먹을, 같은 나라 안에서 이런 차별을 하다니... 생각컨대 ➀할인 혜택을 안 해줘도 볼 사람은 볼 거라는 계산, ➁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입장 혜택 불허를 통해 한국인 관광객 수를 줄여볼 속셈, 아니면 ➂외화벌이로 내수의 어려움을 덜어보자는 속셈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100m 정도 더 올라가면 돌무덤(적석총) 형식의 ‘태왕릉’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장군총의 약 2배 크기로 규모는 한 변이 62.5m~68m, 높이는 14m에 달한다. 태왕릉이라는 이름은 1913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전돌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 새겨져 있던 데에서 유래했다. 주변 1만여 기의 고구려 무덤(통구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태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파괴가 심해 원형을 잃은 지 오래이며 원래는 장군총처럼 피라미드 형태였다고 한다. 내부 돌방에 2개의 관대(棺臺)가 있으므로 부부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계단을 타고 높은 돌무덤 정상부에 오르자마자, L 사장은 이번에는 드론을 꺼내 공중 촬영을 시도했다. 그런데 검은색 복장을 한 사내가 계단 아래쪽에 나타나 우리 쪽을 계속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불길한 마음에 한 바퀴 촬영을 마친 L 사장에게 즉각 중단할 것을 종용했다. 마지못해 드론 촬영을 멈췄는데 돌아오는 날까지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여하튼 L 사장의 드론 사랑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1.5km 떨어진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의 ‘장수왕릉(장군총)’으로 옮겨갔다. 고구려 돌무덤(石塚) 중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m, 높이는 14m에 달한다. 기단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 적석 밀림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변만 두 개뿐이다. 안쪽에는 향당(享堂)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장대하다. 일찍이 도굴당해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있지 않다. 내부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고구려의 최고 번영을 구가했던 부자(父子) 왕릉을 번갈아 감상하며 1,600여 년 전의 기상을 한껏 느껴보았다.
지안에서의 마지막 코스인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향했다. 지안시의 국내성 뒤편에 있는 산성으로 AD3년(유리왕 22)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며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발 676m의 가파른 산 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쪽에는 퉁구하(通溝河)가 흐르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국내성과 압록강 너머까지 내려다보이므로 적의 동정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성벽 둘레는 약 7km,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고 5개의 성문이 있다. 산성 아래쪽의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은 고구려 초기의 최대 고분군으로 이곳 지역에만 1,500여 기가 있다. 이곳에서 L 사장이 마음껏 드론 촬영하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갈 길이 멀어 환런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의 이동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오녀봉 단풍구’라는 곳에 도착했다. 사전검색에서 본 오녀산성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 확인해 보니 지안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정오 시간이라서 이곳의 휴게소에서 간단히 중국 컵라면으로 요기를 했다. 컵라면은 역시 우리나라 맛이 최고다. 다시 한참을 가다가 택시 기사 왈, “단둥은 퉁화택시로 가기엔 너무 멀어 가는 도중에 다른 택시로 갈아탈 것”이라 말한다. 환런 지역의 다른 택시기사에게 미리 전화해 두었다는 것이다. 졸지에 이름도 모르는 낯선 중간지점에서 짐을 몽땅 챙겨 옮겨 타고 출발했는데, 아뿔싸, 내가 메고 다니던 L 사장의 드론 보조장비가 든 미니 배낭을 길옆에 내버려 두고 출발한 것이다. 급히 달려가 다행스럽게 찾아왔다. 불과 2,300m 정도 전진한 상태에서 알아차려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고가의 장비를 날려버릴 뻔했다.
‘오녀산성’은 생각보다 멀었다. 오후 3시 반이 넘은 시각에 주차장에 도착, 아래 평지에서 입장료와 탑승차량비를 지불한 뒤 입구 쪽 전시관은 게 눈 감추듯 흘려보고 전용차량에 올라타 산 중턱까지 내달렸다. 직접 와서 보면 해발 82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임을 알게 되는데,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 정도이다.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은 고대 비류수(沸流水)로 비정되는데, 중류인 환인저수지 북서쪽 기슭에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오녀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해 천연의 요새가 되었기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서(魏書)》 동이전에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이라 하고, 삼국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이라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 언급하고 있다.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쓰여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오녀산성의 옛 이름인 우라산성의 발음이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 국내성은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노태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 7월 초에 기록된 을두지의 발언에서 묘사되는 위나암성의 지형이 오녀산성의 모습과 비슷해 서기 3년(유리왕 22)에 천도한 위나암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의 지안 지역 천도를 산상왕 재위기(197~227)로 보며, 졸본성을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나합성(喇哈城)’으로 비정했다. 추정이든 비정이든 오녀산성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 첫 도읍지로 거론되다 보니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녀산성 소개를 하다보니 다소 장황해졌지만, 방문객이 치러야 할 수고는 적지 않다. 할인 혜택이 전혀 없는 고액의 입장료 105위안(한화 21,000원) 부담에다 최소 20분 이상 비지땀을 흘리며 999개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게다가 정상을 코앞에 둔 일부관(一夫關, One-man Pass)에 도전하는 것은 목숨 건 사투다. 몸뚱이 하나 겨우 통과할 가파른 암벽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 이곳을 통과하려 한 이유는 이곳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올려서이다. 일부관 앞에 세워진 안내판 문구도 용기를 북돋웠다. 간체자 한자는 잘 모르겠고, ‘Leave nothing but the footsteps, Take nothing away but memories’ 영문 글귀가 눈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 밑의 한글판 문장이 ‘발자국 말고는 아무것도 안 남기고 제외하고는 추억 아무것도 하지말고 잡혀갔고’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엉망진창 한역인가. 내가 올바르게 번역해 본다면 ‘오직 발자국만 남기고, 추억 외에는 아무것은 가져가지 마라’이다. 한 마디로 “올라오느라 수고한 만큼 추억을 듬뿍 챙겨 가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외교부 관계자가 혹 이 글을 읽는다면 즉각 이곳의 한글판 안내 문구를 고쳐줄 것을 간청하는 바이다.
바둑판마냥 널찍한 산 정상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 동상을 필두로 천지 못, 궁궐 자리, 병영지와 창고 터 등이 남아있는데, 이곳의 천지 못의 물은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 얽힌 전설을 잠시 소개하면, “발해 대조영 통치 시절, 전란과 비적들의 난으로 성내의 식량과 물이 다 떨어졌을 때 오녀산 일대의 다섯 여자가 지극정성으로 하늘에 빌자, 이에 감복한 관음보살이 하늘에서 단비를 내려주고 땅에서는 샘이 솟게 해 승리할 수 있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다. 산 아래 호수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곳을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몇 컷 남기고 하산했다. 오가는 시간이 길어져 오후 5시 반이 되어서야 기다리고 있던 택시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단둥에 도착하기까지 별반 기억이 없다. 어둠을 뚫고 달리고 또 달려서 단둥역 근처 예약 숙소(丹東丹鐵商務宾馆, Dandong Dantie Bussiness Hotel)에 도착한 시각이 밤 9시경, 꼬박 13시간가량의 이동시간 중 두 번째 운전기사의 노고는 말해 무엇하랴. 100위안의 웃돈을 자진해서 건네줬으나 기사는 돈을 더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 시간도 길었지만 단둥으로 가까워질수록 통행료를 부담해야 하는 고속도로 경유가 잦았다. 우리는 합산 200위안을 흔쾌히 건네주고 무사 귀가를 빌어 주었다. 이로써 1,400위안(=28만원)의 택시 대절 고구려 유적지 탐방이 무사히 끝났다. 간단한 식사로 저녁을 때우고 이날도 꿀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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