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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산성유감(山城 遺憾)을 연재하며
[산성유감 1] 남한산성 2017.
 
이상곤 사진작가   기사입력  2019/07/05 [14:19]

반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침을 견뎌왔다. 칠 할이 산지인 이 땅에서, 지리적 이점을 살려 독특한 축성술로 쌓아 올린 산성은 반도를 지켜준 단단한 요새였다.

   

조선 초기,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관념적인 이론을 앞세워 정쟁을 일삼는 사이, 건국 초기의 개혁 정신과 실용성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섬나라 왜국(倭國)은 허약해진 조선을 유린하였다. 

   

관념을 내세운 먹물들이 明(명)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는 동안, 대륙의 새로운 강자 청(淸)은 정예기병을 앞세워 성곽의 나라 조선의 수도를 침탈했다. 청군에 포위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고립되었다. 산성은 더 이상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했다. 조선의 왕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실학을 내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정조는 수원 화성(水原華城)을 축성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집요한 방해가 앞길을 막았고, 왕에게 죽음이 찾아오면서, 조선 중흥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한양으로 향하는 물길을 지키는 경계의 보루였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눈감고 쇄국을 고집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은 곧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했다.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문수산성은 파괴되었다.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혁명군들은 보국안민 기치를 높게 들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들의 꿈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반도를 다시 침탈한 일본군에 의해 우금치에서 좌절되었다. 쫓기던 농민군들은 전라도 담양 금성산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어 허약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해방이 찾아왔으나, 반도는 외세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분단 후 70년 세월이 흘렀다. 허물어졌던 산성은 일부 복원되었지만, 분단 상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오늘, 높디높은 문수산성의 찬란한 성루는 분단의 경계선과 북녘의 산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관념(觀念)과 실용(實用)의 저울 위에 실용의 추를 하나만 더 보탰더라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남한산성 2017. 청(淸)군에 포위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고립되었다. 견고했던 요새 산성은 더 이상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했다. 인조는 고립된 산성을 나와, 남한산성 성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삼전도에서 치욕을 겪어야 했고, 수 많은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사진=이상곤)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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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05 [14:19]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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