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時雨 49회: 두 마음 서로 비치매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기사입력 2018/04/24 [13:15]

시우時雨 49회: 두 마음 서로 비치매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입력 : 2018/04/24 [13:15]

도서관에 들어서면 잘 보이는 곳에 한의원 약장을 닮은 카드목록함이 놓여 있었다. 주제별로 나뉜 나무서랍을 열어 카드를 젖혀 훑어보다가, 옆에 놓인 메모지에 책 위치를 적는다. 높다란 책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잉크 향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국립세종도서관(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본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 군포시민신문

 

팔을 뻗어 책을 걷어낸 틈새로 맞이하는 우연찮은 눈 맞춤에 가슴 설렜다. 여러 날 비슷한 시각에 서가를 드나들며 낯을 익혔지만 끝내 서로를 묻지 않는다. 책 끝장에는 작은 봉투가 달려있었다. 누구 손을 거쳤을까 하는 호기심에 도서 대출카드를 뽑아본다. 같은 이름을 여러 번 발견한다. 어디선가 마음결을 함께 하고 있을 그가 궁금했다.

 

고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 앞에 회계, 법, 토익토플 수험서가 산을 이뤘다. 그 사이를 질러 파스텔 톤 삽화가 들어간 소설을 쥐고, 햇살 들이치는 큰 창가에 앉았다. 도스또예프스키를 읽던 맞은편 이가 그저 반가웠다.

 

겉표지를 열고, 검지를 지면에 눌러 좌左로 밀어내면 낱장이 서로 부비며 사르륵 소리를 낸다. 손끝에 와 닿는 종이 질감이 보드랍다. 책장冊張을 가르며 흘러내린 끈이 이따금 손목을 스친다. 고요한 열람실에, 귀 한가하고 혀 놀릴 일 없이 눈동자는 부지런히 활자를 좇았다.

 

강의시간에 맞춰 나가는 길에, 팔 베게에 이마를 얹고 허리 숙여 곤히 자는 일본인 유학생 ‘사오리’가 눈에 들었다.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뽑아 머리맡에 두고 중앙도서관을 유유히 나왔다.

 

오래되 낡아 해지고 절판으로 사라지는 인문학 도서가 늘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 아예 내 방에 서재를 갖추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어쩌다 돈이 생길 적마다 부지런히 책을 모았다.

 

여덟 종의 중국기서八大奇書, 리처드 F 버턴 ‘아라비안나이트’, 야마오카 소하치 ‘도쿠가와 이에야스’, 테츠카 오사무 ‘붓다’, 박경리 ‘토지’, 홍명희 ‘임꺽정’, 이기영 ‘두만강’, 황석영 ‘장길산’, 에릭 홉스봄의 역사서와 트로츠키주의 서적, 서준식, 앙드레 고르, 이중섭, 루쉰, 정수일, 신영복, 반 고흐, 황대권씨 등의 서간집書簡集과, 자서전, 평전, 유가경전儒家經典, 경제학서가 주를 이뤘다. 책이 차오르면 동네 가구점에서 싸구려 책장冊欌을 사 언덕배기집으로 짊어지고 올라왔다.

 

방 삼면이 종이 더미로 꽉 채워지고 얼마 뒤, 집을 떠나 만덕산에 들어갔다. 주인 없이 묵어 먼지 탈 책들이 안타까워 비슷한 류로 묶어 친구들과 나눴다. 그렇게 마음을 비워냈다.

 

빈 몸으로 출가出家했으나 이미 깃든 습관은 무거워, 책꽂이 채우고 비우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그리고 어느덧 ‘읽는 나’는 ‘쓰는 나’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전古典의 풍미風味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여, 글을 낼 때마다 벌거숭이 마냥 부끄럽다.

 

옛 문인文人이 이름난 선비의 시詩를 빌려 속내를 전하듯, 길 떠나는 도반道伴을 배웅하며 선시禪詩 한 권에 수줍은 마음을 담아 건넨다.

 

승은 쌍계의 눈에 앉고 僧坐雙溪雪

길손은 오류의 안개 속으로 돌아가네. 客歸五柳烟

두 마음 꿈속에 서로 비치매 遙知相憶夢

초승달이 풀집 앞에 떠 있네. 微月草堂前

- 설담雪潭 자우自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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