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時雨 54회: 인간에 대한 예의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기사입력 2018/07/07 [12:15]

시우時雨 54회: 인간에 대한 예의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입력 : 2018/07/07 [12:15]

 

만덕산 훈련원 골조가 한창 올라갈 제, 농타원 법사님께서 기도실로 급히 부르셨다. “나는 종훈이가 필라델피아 미주선학대학원(Won Institute of Graduate Studies)에 갔으면 좋겠어.” 느닷없는 미국유학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영어가 부족해서 어려운 일이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농타원님은 잘 될 것이니 걱정 말라며 미국행을 기정사실화 하셨다. 그리고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시라큐스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C교무와 형제처럼 지내며 힘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셨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짐을 빼면서, 몇 벌 옷만 남겨두고 나머지 모두를 바로 미국으로 부쳤다. 몇 주 뒤, 주한 미국 대사관에 가서 영사領事와 비자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주황색 문서 한 장을 줬다. 거절한다는 의미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입학허가서만 가지면 문제없다고 믿었던 불찰이었다. 이삿짐은 이미 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고 있는데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안일하고 성급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급히 전문가 상담을 받았다. 비자거부 사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됐다. 불법체류 및 불법취업 가능성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학생비자로 일단 미국에 들어와 그대로 눌러 앉아버릴지 모른다는 점이다. 미혼에다가 한국 내에 소유 부동산도 없고, 또 졸업생 신분으로 직업이 없던 나는, 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 고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불법체류는 자연히 불법취업으로 이어질 테고, 수입을 부모형제에게 송금하리라 지레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학부 전공이 원불교학이다 보니, 학생비자로 와서 포교활동에 집중 할 거라는 의혹도 살만했다. 영사가 의심하기에 충분하지만,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지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욕감을 느꼈다.

 

▲ (사진=픽사베이)  

 

비자 받기는 영 글렀다고 보는 분들이 많았다. 마음고생이 심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박자료를 꼼꼼히 준비했다. 먼저 가족부양을 위해 일자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했다. 동생의 재직증명서와 소득금액증명원을 뗐다. 국방부에 가서 아버지가 군인연금을 수령하고 있다는 서류를 받았다. 추가로 부모님 집에 대한 재산세납입증명서를 입수했다.

 

학업을 마치고 반드시 미국을 떠난다는 믿음을 주기위해, 원불교의 국제훈련원 건립 소개 자료를 준비했다.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명상을 지도하려 잠시 미국에서 교육받을 뿐이라는 확인서를 교단에서 만들어줬다. 경찰서에서 발급한 범죄경력증명서도 챙겼다. 그러나 두 번째 비자면접도 실패했다. 담당 영사는 준비한 모든 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시 여러 달을 보냈다. 어른들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는지 결국 세 번 만에야 간신히 비자를 손에 넣었다.

 

애탔던 경험 때문인가, 제주도에 온 500여명의 예멘인들이 처한 상황이 낯설지 않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피해 온 사람들이 난민 심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가짜 난민이 아니라는 증거를 마련하느냐 동분서주東奔西走 하고 있을 그들이 눈에 밟힌다. 

 

일부 한국인들은 예멘 사람들을 아예 예비 범죄인 취급한다. 노골적으로 혐오한다. 여기엔 무슬림에 대한 편견도 한 몫 한다. 그들을 향한 무례한 태도가 언젠가는 본인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까? 미국 영사 앞에서 한 없이 초라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쁜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싸늘한 시선을 잠시 거두고, 예메니들을 손님으로 온 옛 인연으로 여겨보면 어떠한가? 불교관점에서 만남은 아무렇게나 이뤄지지 않는다. 비록 지금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오늘의 인연은 지난 숱한 생을 함께한 결실이다. 절로 반갑다면 과거생의 선연善緣으로 알아 환대하고, 왠지 거슬리고 미우면 악연惡緣으로 알아 정성으로 모시며 묵은 업業을 녹여내는 게 참된 불자佛子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일을 안다면 손님으로 온 옛 인연을 어찌 소홀히 대하겠는가.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돈 들이지 않고 복 짓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따스한 눈빛, 밝은 미소, 부드러운 말씨, 공손한 몸가짐, 착한 마음, 앉을자리 양보...이것이야 말로 곤경에 빠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난민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들도 엄연히 소중한 인간이다. 이웃으로 남든 추방되든 중동에서 온 손님을 대하는 작금昨今 우리의 자세가 성인의 가르침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기독교 신약 히브리서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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