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과정_부끄러운 10주기
시작은 참으로 참담하였다. 군포시민신문이 지난 해 '리영희 선생 9주기 기념 토론회'를 진행한 이후 2020년 10월 초, 시나 재단이나 시민단체 어느 한 곳도 선생의 10주기를 기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전언을 듣고 흥분한 나는 곧바로 시청 S실장을 찾아갔다. 기일까지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다짜고짜 “시에서 행사비만 제공해 준다면 내가 지역작가들을 모아 누가 되지 않는 추모행사를 준비하겠노라”고 민관협치를 들먹였다. 이렇게 시작된 추모행사는 군포문화재단(이하 재단)이 주최·주관하고 행사기획은 내가 맡기로 하여 한 달 반 정도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되었다. 군포시민신문은 리영희 선생 10주기 추모 묘소참배만을 주최하기로 했다
행사준비_소리 없는 전쟁
재단에선 3백만 원을 들여서라도 전문 큐레이터를 쓰자는 말이 나왔다. 내가 제동을 걸었다. 총예산의 20%를 차지하는 고비용을 절감하는 대신 전시디자이너 한 명을 기간제로 고용했다. 이때부터 매주 3회 이상 현장을 찾았다. 평소 ‘정답은 현장에 있다’는 내 지론을 믿어서다. 각 코너의 동선을 잡고, 줄자로 실측을 하고, 주제에 맞춰 각 코너를 스케치한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느낌이 정리될 즈음 전시디자이너와 상의한 내용에 맞춰 문안을 구성하고 이를 디자인해 보도록 지시한다. 전시코너, 즉 5곳의 선생유품(연보/저술/개인유품/사진첩/기념품&상장)과 2곳의 지역작가 출품작(시화/사진/어록) 합쳐서 7코너이다 보니 각종 부착물과 제작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잠깐의 방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바쁜 와중에도 기일 열흘 전인 11월 25일, 군포시민신문 관계자들과 광주 망월동 5.18민주묘역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왔다. 다들 10년 만의 참배에 감격스러워했지만, 나로서는 선생의 10주기 추모행사가 누가 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서약의 장이어서 어깨가 무거웠다. 선생의 기운을 듬뿍 받고 와서인지 그날 이후 일들이 한층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렇듯 전시준비과정은 소리 없는 전쟁이다. 처음 공개하는 선생의 유품을 2회에 나누어 반출하고 개개 사진을 찍어 전시목록을 구체화하고 사모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도출한다. 또 전시할 지역작가 출품작을 사전 검열한 후 D-10까지 출품작 15점을 전달받아 최종적으로 브로셔 제작과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마무리한다. 몇 가지 소소한 부분들을 챙기는 중에 재단과 행사 제목, 현수막 문구 등에서 약간의 이견이 돌출되었으나 슬기롭게 풀었다. 전시 D-1 아침 9시부터 저녁 6가 되어서야 전시 설치가 완료되었다. 간간이 기일(12/5)에 열릴 공연 프로그램과 현수막, 음향기술자 섭외, 출연자들의 연습상태를 점검하며 대망의 리영희 선생 10주기 추모행사 준비를 끝냈다.
개막식&강연_다행한 출발
2020년 12월 2일 오후 2시, 리영희 선생 10주기 추모전시의 막이 올랐다. 시장님과 시의회 의장님, 재단 대표, 선생님 사모님과 리영희재단 이사장이 자리하자, 군포음협 악사들의 장중한 첼로와 클라리넷 연주가 식전행사 곡으로 울려 퍼진다. 숙연해진 장내에서 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하여 사상의 은사 고 리영희 선생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를 만든 데 대해 깊이 치하한다. 기획을 총괄한 신 선생님과 참여해준 만지작동맹 예술가분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리영희 기념관이 건립될 때까지 협치를 계속해 나가길 기대한다”며 머지않아 리영희 기념관이 조성될 것임을 시사했다. 리영희재단 이사장은 “군포가 원하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다짐을 축사로 풀어놨다.
남기선 낭송가의 어록 및 시 낭송 후 전시장 라운딩은 내가 맡았다. “... 선생은 자신이 지은 책으로 말미암아 수차례 구속과 해직을 반복하면서도 이성의 붓을 꺾은 적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17일 밤,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두 달 동안 광주소요사태의 배후조종자로 낙인찍는 회유와 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5.18민주묘역에 묻히셨고 묘비명처럼 ‘이성의 붓으로 진실을 밝히고’ 계십니다...” 라운딩을 마치고 다 함께 사진 촬영을 하는 것으로 개막행사를 끝냈다.
오후 3시, 상상마을 오디토리움에서는 임헌영 문학평론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1950~60년대의 함석헌 선생처럼 1970~80년대에는 리영희 선생이 민족 사상의 은사로 활약하셨을 뿐 지금은 이만한 분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애석해하며 “남들이 표피(表皮)를 볼 때 본질(本質)에 다가가려는 이성의 눈을 가졌던 분”으로 선생을 회고하였다.
추모공연_사랑의 미로
12월 5일 오후 5시, 기일을 맞아 선생을 기리는 추모공연을 열었다. 당초 행사 초안에 공연계획을 넣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재단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기꺼이 동참해 준 출연자들에게 우선 감사하고, 주말 저녁임에도 자리해주신 시장, 국회의원, 도의원, 재단 대표 이하 좌중을 메워준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한다.
첫 순서는 전시 추모출품작 15점을 시장에게 전달하는 기증식을 가졌다. 수묵화가 이근병만 사정상 빠지고 세밀화가 백두원, 시인 양윤정, 사진작가 한재수 그리고 내가 단상에 올랐다. 대표로 내 시화 족자를 전달하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다. 리영희기념관이 건립될 때 장소를 빛내주길 기대하며...
경기 민요 이인희 명창의 ‘비나리’로 공연의 막을 열었다. 숙연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두 번째 시조창은 최희영 교장 선생이 내가 지은 시조 ‘사상가 리영희’를 불러 주었다. 다음 안준모 선생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을’,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노래할 땐 정말로 노랫말에 흠뻑 젖어 ’하얀 겨울‘의 초입을 골라 떠나신 선생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한 감동이 스며든다.
나 홀로 걷다가 뒤돌아보니 인생길 구비마다 그리움만 고였어라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이었지만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산새는 울고 추운 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어라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이어 선생이 생전에 좋아하셨다는 가수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박은옥의 ’봉숭아‘, 안치환의 ’광야에서‘ 등을 앙상블 연주와 노래로 이어갔다. 보컬리스트 송주희는 데모대열에 합세했던 6월 민주화 항쟁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선생이 떠오른다고 토로한다. 한층 고조된 분위기를 몰아서 다 함께 선생의 18번 곡,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합창하는 것으로 행사를 종료했다. 노랫말을 음미해 보니 왜 이 노래를 18번 삼아 부르셨는지 이해가 간다. 바로 노랫말에 ’진실(眞實)‘이란 말이 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사랑으로 눈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맺는말_리영희기념관을 짓자
정리하는 글을 쓰다가 10주기를 넘긴 채 미적대고 있는 『리영희기념관』 문제를 생각해 본다. 들리는 말로 곧 비어있는 8단지 파출소 자리에 가칭 ‘시민 커뮤니티 센터’를 건립하여 일부에 ‘리영희기념실’을 마련할 거란다. 작년 시의회 모 의원이 “빨갱이 기념관을 세울 수 없다”고 항변하여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이에 관해 사적인 소견을 밝혀본다.
첫째, 선생이 빨갱이인가.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 때 덧씌워진 올가미는 풀어야 할 족쇄가 아닌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7할의 공(功)과 3할의 과(過)’를 언급하면서도 과를 덮고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모셨다. 선생이 주장했던 정세 비평이 지금도 요소요소에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선생의 진실과 자유의 정신을 그렇게 매도해도 되는지 심히 안타깝다.
둘째, 8단지에 27년째 살며 지금 건립하려는 파출소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닌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장소의 적격성은 백 번 공감한다. 그런데 뜬금없는 ‘시민 커뮤니티 센터’라니, 바로 길 건너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초막골생태공원이 존재하고 아파트마다 주민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마당에 시민 공간을 또 마련하겠다니, 제정신인가. 대한민국 언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고, 16년간 군포에 거주하며 지역 발전에도 힘썼던 선생을 기리는 사람이 국내외 각지에 여전히 많아서, 성함만으로도 상품성이 대단히 높은데 굳이 용도 불투명의 명칭을 쓰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자주 방문하는 광명의 ‘기형도문학관’과 단순 비교해 볼 때, 단 한 권의 유고시집을 냈던 기 시인에 비해 선생의 콘텐츠는 수십 수백 배에 달한다. 국내 최초의 ‘리영희기념관’을 세운다면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안 그래도 수리산, 철쭉 말고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군포시로서는 천군만마 같은 문화 성지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대도 ‘시민 커뮤니티 센터’라 짓는다면 시민의 전유물로만 전락하지 않을까. ‘리영희기념관’ 명칭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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