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4.3이 머우꽈?

- 경기중부민주화계승사업회 제주4.3 추모 기행 -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기사입력 2023/04/24 [06:59]

[기고] 4.3이 머우꽈?

- 경기중부민주화계승사업회 제주4.3 추모 기행 -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입력 : 2023/04/24 [06:59]

  4월 18일(화)부터 4월 20일(목)까지 사흘간 경기중부민주화계승사업회(이하 민계사) 주관으로 35명의 ‘제주4.3 추모 기행단(단장 조완기)’이 꾸려졌다. 기행 내용을 담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민계사와 제주4.3사건을 간단히 소개한다.

 

  민계사의 앞글에 따라붙는 ‘경기중부’는 안양·군포·의왕·과천 4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회는 이 4개 지역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과거 민주화 역사를 기리고 지속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밟아가고자 하는 민주시민단체이고, 4.3사건은 1945년 해방 이후 건국의 혼란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참히 희생된 제주 대학살(Jeju holocaust) 사건으로서 가장 치욕적이고도 가슴 아픈 대한민국 근현대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 당초 4.3추모기행 일정표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4월 18일

 

 

  원래 계획으로는 오전 11시 제주공항에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삼삼오오 김포공항에 모여들었으나 첫 비행기부터 무더기 결항이다. 이유는 제주공항에 초속 15m의 강풍이 불고 있어서란다. 정오가 다 돼서야 탑승이 개시되었으나, 아침 6시 25분 발 비행기표는 대기·지연을 거듭한 끝에 저녁 7시 30분 발로 밀려났다. (지연 표도 못 구한 세 사람은 결국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조천읍의 숙소 <이을락>에 도착, 서운함과 피곤함을 술로 달랬을 뿐

 

  4월 19일

 

  어제의 불상사로 오늘 일정이 빡빡해져서 아침 8시 전세버스에 탑승, 함덕해수욕장 ‘은희네국밥’에서 간단히 해장 후 곧바로 ‘이덕구 산전(山田)’으로 향했다. ‘사려니숲길’을 한참 걷다 보니 ‘천미천(天彌川)’ 위쪽에 ‘제주4.3유적지(교래 북받친밭)’ 안내판이 나오고, 숲길을 헤치고 숨차게 더 오르다 보면 문제의 산전이 나온다. 이곳은 1949년 2월 진압군의 대토벌에 밀려 산으로 숨어든 유격대(대장 이덕구)의 주둔지였다. 깨진 솥과 그릇들이 군데군데 흩어져있고 단 옆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다.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정유년 6월-’ 목시(木詩)만 이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있다. 술 한 잔 올리고 다 같이 묵념했다. 

 

  이날 해설사로 나선 현지의 고성환 선생은 “1948년 4월 3일 초대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남로당원)이 이끈 350여 명의 유격대가 12군데 경찰서를 급습한 이래로 미군정의 지도 하에 경찰과 경비대, 서북청년단 등 진압군의 공세가 거세진다. 같은 해 8월 조선인민대표자회의 참석차 해주로 떠난 김달삼 후임으로 이덕구가 제2대 유격대 사령관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9년 6월 전투 중 경찰의 총격에 쓰러지고 만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에 전시했다”고 설명한다. 

 

▲ 이덕구 산전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오르내리는 길 내내 사약에 쓰이는 천남성과 충효의 상징인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치 항쟁 세력과 토벌 세력이 대치 국면을 이룬 가운데, 간간이 산더덕 내음이 짙게 배어 나올 때면 저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유격대장이었던 이덕구 김달삼은 왜 20대의 젊음을 불살랐을까. 둘 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고 후학을 가르치는 교사 신분이었다. 저들의 지력은 뇌를 깨칠 만했고 저들의 시력은 세상의 부조리를 가슴에 담을 만했다. 좌니 우니 하는 교조적 사상에 앞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또다시 불어닥친 미군정 지배와 이승만의 단선단정(單選單政, 단일선거 단일정부) 획책, 서북청년단을 앞세운 무자비한 양민 탄압, 암울한 민생문제 등 온갖 부조리가 저들을 항거의 대열로 몰아넣은 게 진실이라고 생각하니 울컥 목이 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제주 서남단 모슬포의 ‘알뜨르비행장’ 일대이다. 이곳은 1934년 제주도민의 강제 노동으로 세워진 일제의 공군비행장으로서 중일전쟁 땐 출격기지, 태평양전쟁 땐 미국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아직도 활주로, 관제탑, 격납고, 지하벙크 등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인근에는 ‘예비검속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여기서 예비검속(豫備檢束)이라 함은 ‘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을 뜻한다. 1950년 한국동란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군경을 동원, 보도연맹원·형무소수감자·좌익사상가로 의심되는 사람 상당수를 북한군에 동조할 적으로 간주해 모조리 살해했다. 같은 이유로 8월 20일 새벽, 이곳의 예비검속자 200여 명도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차에 실려 끌려가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신발을 길 위로 벗어던져 무고한 죽음을 알렸으므로 추모비 석대 위에는 검정 고무신들이 길게 놓여 있다. 다만 시신을 젓갈 담그듯 포개어 방치했었다는 학살터 자리에 세운 추모비에 국화(國花)인 무궁화꽃 문양의 개석(蓋石)을 새겨넣어, 오히려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학살을 자행한 국가권력이 무슨 염치로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 예비검속 섯알오름 희생자추모비 묵념 장면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잃어버린 마을-무등이왓’이다. 무등이왓 마을은 동광리 5개 마을 중 가장 규모(130여 호)가 컸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아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산지였다. 그런데 해안에서 5km를 벗어난 산간 지역에 소개(疏開)령을 내리며 토벌대가 설치던 1948년 11월 미처 마을을 떠나지 못한 주민 10여 명을 개 패듯이 팬 후 총살시켰다(최초 학살터). 12월에는 전날 학살한 양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을 예상, 잠복하고 있다가 일가족 10여 명을 한 곳으로 몰아 짚 더미와 멍석을 덮어 노인과 여성,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잠복 학살터). 소개령 이후 이곳에서만 100여 명이 희생당했다. 토벌은 ‘징벌적 행위’이다. 살던 마을을 떠나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 징벌의 대상인가.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길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와 제주 삼겹살과 전복, 버섯 등으로 마련한 구이와 아침에 캔 쑥으로 만든 전으로 술판을 벌였다.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자신들을 소개하며 노래도 함께 불렀다. 나는 <부용산> 노래를 생애 처음으로 불러보았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어가고...” 1948년 10월 제주진압 명령을 거부해서 발생한 여순반란사건 아흐레 전 지어진 이 노래는 폐병으로 죽게 된 여동생과 제자에 대한 진혼곡이었으나, 지리산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시를 지은 박기동과 곡을 붙인 안성현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은 사연 또한 4.3과 무관치 않아서다. 나는 이날 아침부터 하루종일 복통에 시달렸다. 슬쩍 자릴 피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4월 20일

 

  6시쯤 눈을 떠 같은 방의 최병필 씨와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이번이 초면(初面)이라서 통성명을 나누다 보니 전남 곡성 출신이지만 군포 생활 30년째로 나와는 가까운 이웃이다. 살아온 이야기, 자식 이야기들을 나누며 정감을 쌓았다. 여행의 진미는 사람들을 하나둘 알아가는 데 있다. 삶은 달걀과 빵, 주스로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9시경 다른 볼일이나 공항으로 가야 하는 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21명이 마지막 북촌4.3도보길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서우봉 일제진지동굴’. 서우봉은 해안선이 산 너머 함덕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이곳 해안선을 빙 둘러 20개의 진지동굴이 조성되어 있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자살폭파공격을 위해 구축했던 곳이다. 포구로 향하는 도중 ‘환해장성(環海長城)’을 만났다. 1918년 김석익 저술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처음 등장하는 이 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려부터 조선에 걸쳐 쌓은 성이다. ‘북촌포구’는 4.3 학살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1948년 6월 우도 지서장과 순경 가족 13명을 태운 배가 풍랑으로 북촌포구에 잠시 정박하던 중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경찰 2명이 희생되어서다. 11월 이후 초토화작전이 개시되며 이듬해 2월까지 마당궤, 낸시빌레, 몬주기알, 당팟, 꿩동산, 옴팡밭, 너븐숭이(=넓은 돌밭) 등지에서 무려 마을주민 400여 명이 학살되어 제주도 마을 중 가장 큰 피해 마을이 되었다. 너븐숭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순이 삼촌은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으로 재현되었고 2008~9년에 이르러 정부 지원으로 이곳에 ‘순이삼촌 문학비’와 ‘너븐숭이 4.3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서우봉 일제진지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북촌마을을 한 바퀴 돌다 보니 곳곳에서 퐁낭(=팽나무)을 자주 보게 된다. 마을 탐방을 끝낸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퐁낭은 온갖 애환과 시련을 견뎌낸 북촌마을의 심볼임을 알게 되었고, 매년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념관 내 허영선 시인의 ‘법 앞에서’ 시를 읽는 동안 또다시 가슴이 저민다. “(중략)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안 보이던/ 사람이 풀씨마저 안 보이던 시절/ 죄 없이 죄가 된, 법 아닌 법 앞의 사람들/ 모욕도 수치도 속수무책 법 아닌 법 앞에서/ 눈도 입도 다물던 사람들, 이제 한번/ 묻습니다, 법 앞에서// 거기 꽃 피었습니까// 여기 꽃 피젠 헴수다” 시의 마지막 행을 표준어로 바꿔보면 “여기 꽃 피려 합니다”라는 미래진행형이 된다. 울분 섞인 흑역사를 가슴에 묻고 꽃을 피워내려는 용서와 화해의 염원이 담긴 시다. 누가 누굴 용서하랴.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라지거나 입 다물고 있는 상황에 누가 ‘진실’을 밝혀주랴. 우리가 ‘역사의 알맹이’를 밝혀내야 하는 이유이다.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공식 일정은 모두 끝냈다. 저녁 비행 편 예약자와 잔류 일행 몇몇이 오일장이 열리고 있다는 세화(細花)로 향했다. 오일장을 잠시 기웃거리다가 10분 거리에 있는 ‘해녀박물관’을 찾았다. 가는 도중의 ‘질그랭이(=지그시) 머무는 세화’의 해변 풍경은 자주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보게 되는 8분짜리 영상에서 이미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느끼게 된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잠수 후 물 위로 올라와 내는 소리로 “호오이~호오이” 휘파람 부는듯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했다’는 고문헌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제주 해녀의 역사는 깊다. 인근 ‘연두망 동산’에서는 1932년 1월 구좌·성산·우도 일대의 해녀 1천여 명이 이곳에 모여 세화 오일장까지 만세 행진을 펼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공항으로 가기 전 해변 근처 <이여도식당>에서 우럭지리와 자리물회를 먹으며 사흘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관광은 일체 배제한 채 오로지 4.3의 현장에서 속살을 들여다본 이번 추모 기행은 매우 의미 있는 일정이었다. 현장에서 느낀 바를 주관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건대 ①사건의 전말을 시기로 논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47년 3.1절 사고가 배경이니, 1948년 4.3 경찰서 습격 무장봉기가 시발이니 하는 시기적 논점은 둘 다 과정에 불과할 뿐, 실상은 해방 전후의 무정부 상태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실책과 오판이 빚어낸 참극이어서다. ②남로당이 사건의 주동 역할을 했다는 점은 과장된 것이다. 4.3 초대 유격대장 감달삼 외 극소수 남로당원이 선동했던 ‘미군정 반대/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는 당시 식자들의 전반적 입장이었으며 제주도민들의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을 따름이다. ③우발적으로 일으킨 무장유격대 민중봉기에 군경이 합법적으로 진압과 토벌을 가한 사건이 아니다.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이어진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으며, 국권 회복과 단일정부 수립을 원하는 민중을 빨갱이로 몰아 반공권력이 의도적으로 벌인 대학살극일 뿐이다. ④따라서 ‘제주4.3사건’이라는 명칭 대신 ‘해방전후 제주민중항쟁’이라 고쳐 부르기를 제안한다. 4.3이란 숫자는 가해자인 국가권력이 피해자 코스프레로 삼기 위한 수식어에 불과할 뿐, 불의와 탄압에 항거한 8여 년의 나날들은 하루하루가 민중항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끝으로 ‘제주4.3사건’으로 운을 띄워 추모 시조 한 수를 헌정한다.

 

  제주가 붉은 피로 흥건히 물들던 날

  주책없이 눈물만 흘릴 순 없었어요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부한 저들 앞에

 

  삼삼오오 제 가슴 속 심장을 도려냈죠

  사납던 바다 위로 펄떡이게 하리라고

  건사할 자유를 위해 피를 바친 사육제

 

▲ 너븐숭이 4.3위령비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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