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 연휴를 한 주 앞둔 9월 23일, ‘강화도 평화기행’에 나섰다. 본 행사는 6.15공동실천경기중부본부(대표 장재근)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매달 펼치고 있는 통일힐링걷기 행사로서, 이번이 올해 마지막 기행이다.
안양시청 정문 앞 정각 8시, 40여 명의 일행을 태운 버스는 장도에 올랐다. 이번 기행의 해설사로 나선 경기평화교육센터의 곽인숙 선생은 “이렇게 정시에 출발하는 모범적인 기행팀은 처음”이라며 몇 가지 퀴즈를 내며 몸풀기에 나섰다. 그중에는 “강화도가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섬인가”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몇 번의 오답 끝에 정답자가 나왔다. 정답은 네 번째다. 기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나도 궁금했던 터라 함께한 사학자 이진복 교수에게 물어 “원래 5위였으나 간척 덕에 4위로 올라서게 되었다”는 정답을 미리 알게 되었지만 더딘 순발력 탓에 부상(과자)을 얻는 행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참고로 제주도>거제도>진도>강화도>남해의 순이다.
초지대교를 넘어 9시 20분이 채 안 된 시각에 첫 번째 목적지인 ‘광성보(廣城堡)’에 도착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안해루(按海樓)가 나온다. 한자 按海는 ‘바다를 주무르다’는 뜻으로 제해(制海)를 말함일 것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니 1871년 강화해협을 침범한 미 해군에 맞서 싸운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쌍충비각(雙忠碑閣)과 당시 51명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을 4기의 분묘에 나눠 합장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나온다. 우리 일행은 누군가의 제안으로 선조들의 순절을 기리는 묵념을 했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와 마주친다. 돈대(墩臺)는 진(鎭), 보(堡) 속의 ‘소규모 진지’로서 강화도 내에는 총 52개의 돈대가 해안선을 따라 세워져 있다. 곽 선생의 해설을 빌리면 “5천년 역사에서 강화만큼 침탈을 많이 받은 곳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강수계를 기준으로 국내외 세력의 뺏고 뺏기는 쟁탈이 거듭되었는데 해상으로 드나드는 그 길목에 강화가 있어서였다. 19세기 말은 서양 오랑캐가 설치던 때였다. 1866년에 프랑스가 강화도로 쳐들어온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 당시에도 남북전쟁 실전 경험이 있는 미군들이 월등한 총기를 소지하고 강화 초지진과 김포 덕포진을 무너뜨린 뒤 광성보를 공격해 왔을 때에도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병 6백여 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당시 한 미군장교의 증언에 의하면 “흰옷(white pajamas)을 입은 조선 수비병은 호랑이처럼 싸웠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토록 장렬하게 싸운 국민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무기가 다 떨어지면 돌을 던지고, 흙이라도 뿌려서 끝까지 싸우다가 포로가 되기 싫어 바다로 뛰어든 인원만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양 돈대를 오가는 사이 이 교수가 당시의 건축기법을 잠시 소개한다. “성이나 요새의 축성에는 높은 석벽이 기본이었는데, 석벽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물빠짐이 중요해서 석벽 크기에 따라 물빠짐돌의 숫자도 늘어난다. 이를 증명하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인 수원화성의 장안문에는 총 4개의 물빠짐돌이 존재한다. 또 요새인 돈대에는 그 크기에 맞게 석벽 위에 여장(女牆)을 세웠는데, 이는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일정 간격으로 벌어진 틈을 타구라 하며 타구와 타구 사이를 일타라 부르는데, 총안(銃眼) 세 개의 일타마다 3~5명의 병력이 배치되는 양상”이었다고 설명을 곁들여줘 요새의 견고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손돌목(孫突項) 이야기를 끝으로 남기며 오전 일정을 마치고자 한다. 손돌목은 김포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으로서 대안(對岸)의 광성보와 서로 돌출해 있어 밀물 때면 급류를 이뤄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여기서 손돌은 뱃사공 이름인데 그에 관한 전설은 이렇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로 가던 왕을 태운 배가 급류 쪽으로 흔들리자 위험을 느낀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죽기 전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 그것이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를 죽인 뒤 말대로 해서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 해협 건너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인근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찾아간 두 번째 방문지는 ‘한국전쟁 중 강화지역 민간인희생자 추모비’. 이곳은 강화역사에 해박한 이 교수도 처음이랄 정도로 일행 모두에게 무척 생소한 곳이다. 곽 선생의 설명을 듣자 하니 강화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북한군에 점령당한 곳이다. 보도연맹에 대한 예비검속이 채 일어나기도 전, 1950년 10월까지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수복 이후 남한 전역에서 대대적인 부역혐의자 색출 및 검거, 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우익청년단체를 중심으로 치안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전선이 밀려 강화를 떠나야 했던 1.4후퇴 시기에는 사슬재, 양조장, 경찰서, 돌머리포구, 갑곶나루 등지에서 무고한 숱한 생명들이 죽어나갔다. 이곳 민간인희생자 추모비 옆에는 32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묘석들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었다. 돌머리포구와 사슬재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이다.
거기에는 두,세살박이 갓난아기들과 몰살된 가족들의 이름이 또렷한데, 두 개의 돌을 이음매로 붙인 추모비 속의 ‘한국전쟁 중 강화지역 민간인희생자 추모비’란 글씨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훼손된 채 읽기조차 힘들다. 틀림없이 역사에 부끄러운 자들의 소행일 것이다. 즐비한 묘석들 한구석에는 누군가에게 뽑혀진 방문자들의 푯말도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다. ‘한국전쟁 중 희생된 분들을 추모합니다-한국·중국·우즈벡 청년 모임 워너피스’, ‘희생자들을 기립니다-평택 꿈의 학교 학생 일동’, ‘모두 어디로? 그가 있었다’,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밝은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 따윈 없다‘, 등등 푯말이 나뒹굴고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텐데, 이들의 소행이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러웠다. 여기서도 일행들은 희생된 넋들을 기리는 묵념을 올렸다.
마지막 목적지로 가는 길에 재래시장에 잠시 들렀다. 섬에 와서 회를 안 먹고 갈 수 있겠냐는 임 선생의 제안에 십시일반 돈을 거둬 회 파티를 열기로 해서였다. 졸지에 20여만 원어치의 횟감과 술을 싣고 연미정(燕尾亭)에 도착한 시각이 2시가 채 안 되었다. 한자 燕尾는 말 그대로 제비 꼬리이다. 한강과 임진강, 바로 위 예성강 물이 이곳에서 합쳐지는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정자 이름이다. 고려 고종 강화천도기 때 이곳에 사립 교육기관인 구재(九齋)가 있었고, 조선 시대 삼포왜란 때 공을 세우고 함경도 반란을 진압했던 황형(1459~1520)에게 조정이 내린 폐사지여서 정자 입구에는 그의 택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강화 10경의 하나일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며 바다 건너 황해도 개풍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사이에 떠있는 유도(留島)에는 한때 북한에서 떠내려온 황소 한 마리가 6개월가량 살았다는데, 남북 합의에 의해 제주로 장가보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는 미담이 전해 온다.
한편 이날 연미정에선 주최 측에서 특별히 마련해준 나의 ‘시 창작’ 깜짝 교실이 열렸다. 내가 연재하고 있는 <단풍시선> 제3집(2017 출간)을 참석자 전원에게 한 권씩 선물해서다. 나는 강의에 앞서 남북이 통일된다면 국호를 ‘고려(Korea)’로 해야 한다는 조언과 최근 불거진 홍범도 장군 논란에 선을 긋는 몇 가지 역사적 진실을 전달했다. 이날 시 창작 강의의 요지는 “직접 명명한 단풍시(短諷詩)는 ‘짧은 풍자시’로서, 전통시조 율격(3·4·3·4/3·4·3·4/3·5·4·3)에 맞추어 시제(詩題)로 초·중·종장 운을 띄워 시를 짓는 것이다. 일기 쓰듯 매일 짓다 보니 7년 사이에 창작된 시가 3천여 편에 이른다. 여러분도 창작게임처럼 즐겨보시라. 치매 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이 직접 낭송해 보며 단풍시의 벽을 허물어 보았다.
이로써 오늘 ‘강화 평화기행’이 모두 끝났다. 떠나기 직전, 인근 풀밭에서 숭어회와 전어회 안주로 가을 아유회를 잠시 즐겼다. 주최 측 신영배 위원장은 평화기행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이라면서도 입안 가득 미소가 환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 인사도 나누고 술잔을 나누며 우의도 다졌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일행분들의 요청에 따라 ‘강화도’를 운을 띄워 즉석에서 기행 감상을 단시조로 한 수 남겼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북녘을 바라봤네 화낸들 어찌하랴, 갈라진 남북 강토 도무지 떨어지잖던 돌아가는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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