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역사기행기-1일차 선양

동네 형님 두 분과 떠난 여행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4/10/29 [08:12]

202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역사기행기-1일차 선양

동네 형님 두 분과 떠난 여행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4/10/29 [08:12]

  동네 형님 두 분과 아래의 일정으로 4박 5일간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성도이자 제1의 도시인 선양시를 시작으로 랴오닝성 제2의 도시인 다롄시 및 뤼순커우구에서 마무리했던 닷새간의 여행을 일정 순으로 기록해 본다.

 

  일정: 10/11~12 선양(瀋陽)/랴오양(遼陽) - 10/13 퉁화(通化)/지안(集安)/환런(桓仁) - 

        10/14 단둥(丹東)/다롄(大連) - 10/15 뤼순커우구(旅順口區)


 

 

1일차(10/11, 금) 선양

 

  새벽 5시 산본 정류장에서 공항버스에 몸을 실어 도착한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서 오전 8시 정각에 이륙했다. 선양공항을 빠져나온 시각이 아침 8시 반경(-1시간 시차), 기내식도 했겠다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랴오닝성 박물관’으로 향했다. 

 

▲ 랴오닝성박물관 로비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오전 9시 즈음, 막 문을 여는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입장객들이 들어선다. 우리도 저들을 따라 3층 시대별 문명관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이 중 랴오닝성과 내몽고에 걸친 서요하 유역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700~B.C 2900경)의 대표적인 유물(빗살무늬토기, 옥기玉器, 적석총赤石冢 외)들이 눈길을 끈다. 일명 요하공정(遼河工程)은 중국 동북부 요하 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련하여 제시된 공정의 하나로 정식 명칭은 2003년 6월부터 시작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으로서 한마디로 ‘뿌리 찾기 운동’을 말한다. 현재 중국은 황하문명보다도 빠른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의 3대 선사시대 문명은 요하/황하/장강 문명이다.

 

  2층은 주제별 전시장인데, 시대별로 화폐나 불상, 복장 등의 변천사를 읽어낼 수 있다. 가령 화폐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➀패화(贝币)_중국 중부 최초의 화폐로 상나라 때 조개껍데기가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 점차 석패화(石贝币), 골패화(骨贝币), 조개화(蚌贝币) 등 인공 패화로 발전했다. 상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구리로 만든 금속 패화가 등장했다. ➁구리주화 (铜制铸币)_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화폐가 존재했지만 구리주화가 상업거래의 주요 화폐가 되었다. ➂동패(铜贝)_전국시대에는 조개 패가 모두 구리로 제작되었고 이런 동패를 의비전(蚁鼻钱)이라 한다. ➃도폐(刀币)_처음에는 칼을 교환 매체로 사용하다가 구리 모조품 화폐로 발전, 춘추전국시대에는 휴대가 편리하도록 소형화되어 도폐가 되었다. 도폐는 주로 제·옌·조(齐,燕,赵) 3국에서 유행했는데, 제의 도폐 모양은 더 크고 뾰족하고 옌과 조는 더 작고 네모나거나 둥근 모양을 띠었다. ➄포화(布币)_괭이, 삽과 같은 유형의 농기구가 점차 진화해 주로 삼진(三晋), 즉 한,조,위 3국에서 유행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포화 화폐가 널리 유행해 도폐를 능가했다. ➅원전(圆钱)_동그란 모양의 돈으로 네모나거나 둥근 구멍은 뒤에 늦게 등장했다. 주에서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주왕기(周王畿) 내에서만 유통되었다. ➆교자(交子)_동전을 휴대하는 게 불편해지자 북송에서 교자 지폐가 등장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지폐 중 하나이다. ➇초(钞)_명나라 때 일종의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宝钞)가 발행되었다. 큰 거래는 주로 은을 사용하고 작은 거래는 지폐나 동전을 사용했다. 모두 10명의 황제가 연호전을 주조했는데, 황제 주원장의 이름 속 '원(元)'자를 기피했으므로 통보(通宝)라 불렀다. ➈위안화(人民币)_인민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위안'은 더 오래되어 원래 은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500여 년 전 유럽상들이 중국상들과 무역할 때부터 사용했다. 보조화폐 단위는 각(角)과 분(分)으로서 1원은 10각, 1각은 10분이다.

 

▲ 남송 왕조와 북부 주 왕조의 원전 (사진=신완섭)    ©군포시민신문

 
  2,3층만 도는 데도 2시간 이상 시간이 걸렸다. 중국어, 특히 간체자에 미숙해서인지 ‘볼 건 많은데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다’보니 안구 피로감이 물밀 듯 밀려온다. 다리 허리 통증도 만만치가 않다. 다행히 1층은 전시공간이 없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12시경에 만나기로 한 현지 한족인 류차오랑이 승용차를 끌고 마중 나왔다. 20대 때 한국에서 4,5년간 학원강사 생활을 했다는 올해 39살의 그녀는 함께 간 L 사장의 중국어 선생이었다고 한다. 사제 간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L 사장이 준비해간 정관장 선물과 R 여사가 가져온 과자 선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점심 대접과 고궁관광 안내를 자처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식사 장소는 선양고궁 근처 쫑지에(中街) 일대였다. 평일 점심시간치고는 오가는 사람이 꽤나 붐비는 선양의 번화가 중 한 곳이란다. 중국음식(中國菜) 전문점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요리를 다섯 가지나 시키는 바람에 첫날 첫 식사부터 다 먹지 못한 음식을 포장해 갈 정도로 포식하였다.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칸왕궁터(汗王宮遺址)에서 고궁 입구에 이르기까지 외곽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옛 정취를 맛보았다. 입장료는 70세 이상이면 면제, 60~69세면 반값이어서 노인 우대를 받고 고궁 안으로 들어서니 숭정전(崇政殿)이 우릴 맞이한다. 이곳은 숭덕제(청 태종 홍타이지)가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였으며 청나라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양고궁에 머물 때 이곳에서 정사를 돌봤다. 정면 5칸이며 전각 바깥의 정원 좌우에 비룡각(飛龍閣)과 상봉각(翔鳳閣) 7칸이 있다. 

 

  동로(東路)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대정전(大政殿)과 십왕정(十王亭)이 나온다. 대정전은 고궁의 정전이자 동로의 중심 건물로 처음 건설되었을 때의 명칭은 대전(大殿)이었으나 1636년(숭덕 1) 독공전(篤恭殿), 강희제 때 대정전으로 개칭되었다. 팔각형으로 된 특이한 구조라서 언뜻 보면 정자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정전이다. 유목민의 이동식 텐트를 본떠지었다고 한다. 황색 유리기와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정면의 두 기둥에는 금도금한 용 조각이 감겨 있다. 천명제, 숭덕제, 순치제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으므로 지금도 여러 택시나 조형물에 자주 등장하는 선양의 상징물이다. 십왕정은 길이 195m, 너비 80m의 대정전 광장 양쪽 좌우에 도열해 있는 10채의 전각은 당시 팔기군(八旗軍)의 집무실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 선양고궁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이로써 2시간가량 고궁 일대의 관람을 끝냈다. 당시 후금과 청의 수도였던 묵던(Mukden)에 위치한 이 궁궐은 누르하치 칸에 의해 축조되기 시작해 1644년 5월 산해관 입관 전까지 홍타이지 대칸과 풀린 대칸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별궁으로 사용되다가 1924년 궁전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동삼성박물관(東三省博物館), 1955년 선양고궁박물관(瀋陽故宮博物館), 1986년 선양고궁박물관원(瀋陽故宮博物館院)으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자금성과 함께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면적은 자금성의 1/12 크기(면적 약 60,000㎡)로 아담한 편이라 서울의 덕수궁보다도 작고, 근처일개 군벌의 저택 겸 집무처인 장씨수부(張氏帥府)와 면적이 비슷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영어명 'Mukden Palace'으로 등재된 이유는, 선양이 후금에 점령된 후 만주어 묵던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중국식 표기인 성경(盛京)이 되었는데, 이 와중에 이미 서양인들에게 그렇게 불려졌기 때문이다.

 

  중국어 과외 일을 하는 류 여사가 긴급히 전화를 받더니 가봐야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바람에 그녀와의 동행은 고궁 관람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예약해둔 선양역 부근의 ‘전주정선주점(全住精選酒店. Allstay Select Hotel)’으로 택시를 타고 와서 체크인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번에는 선양의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서탑시장(西塔市場)을 찾아갔다. 한글 간판이 여기저기 즐비한 가운데 떡볶이 순대 막걸리 같은 길거리음식과 삼겹살 매운탕 갈비집 등 한식당이 골목을 꽉 메우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음식 맛을 보진 않았다. 외국에서 맛보는 한식은 비싸기도 하거니와 현지화되어 경우도 많아서다. 한참을 둘러본 뒤 늦은 식사는 선양역 근처로 돌아와 중국식 우육면으로 해결했다. 유의할 점은 중국의 역사(驛舍)는 철로 맞은편 출입구와 연결이 잘 안 되어있어서 건너편 숙소까지 또다시 택시를 타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역 광장 진입통로도 의도적(?)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인민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 사회주의의 병폐인 듯 느껴진다. 참고하시라.

 

▲ 서탑시장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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