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명 이야기] 공공언어의 민낯③ - 의왕시에 남은 보물급 도로명 ‘포일세거리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5/02/13 [08:52]

[한국의 지명 이야기] 공공언어의 민낯③ - 의왕시에 남은 보물급 도로명 ‘포일세거리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입력 : 2025/02/13 [08:52]

 편집자주) 본보는 2025년 을사년 정초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종원 명예교수의 지명유래 연재 글을 실어 우리나라 지명 속 공공언어의 민낯을 살펴보고 본래의 우리말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자 한다. 


 

  우리는 흥타령 ‘천안삼거리’ 때문에 ‘삼거리’라는 길이름은 세 갈래 길을 가리키는 유서 깊은 지명인 줄 안다. ‘천안 세거리’는 『여지도서』(18세기 중엽)에 ‘三歧里’(삼기리)로 쓰여 있는데 뭐라고 읽었는지는 모른다. 노래 ‘천안삼거리’는 갑오개혁 이후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명창 보배•진주•강진 등 여러 가수들이 부른 것이라 하니(한국민속예술사전), 말하자면 신민요(新民謠)다.

 

   1910년대 (『조선지지자료』) 충청남도의 ‘세거리’를 보면 아래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당시 한자 표기로는 ‘巨里(거리)’보다는 ‘岐里(기리)’가 더 많이 쓰였고 ‘셰/세거리’라고 읽고 말했다. ‘三岐(삼기)’는 ‘세거리/세갈래’를 뜻으로 옮긴(訓借, 意譯) 한자표기다. 반면 ‘巨里’는 토박이말을 소리만 그대로 옮겨 적었다(音借, 音譯).  충남 연기군 삼기면 양화리(현재 세종시 전월산 아래)에 있던 길 이름에 ‘시거리’가 있었다. ‘삼거리’로 읽었다면 그런 변화가 있을 수 없는데 ‘셋•세’를 ‘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시거리'로 부르는 도로는 전국에 흩어져있다. 세종시 소정면 고등리, 경상북도 영덕군/읍, 태안시 원북면, 익산시 남산면, 영광군 법성면 따위가 그렇다. 『조선지지자료 황해도』편을 보면 ‘세거리’ 뿐이며 ‘삼거리’는 없다.

 한편 三岐•三巨는 ‘삼거리’라고도 읽는다.

 


  『조선지지자료』 경기도 편을 보면 ‘세거리’와 ‘삼거리’가 절반 정도 섞여 나온다. 참고로 부평군 석천면의 ‘삼거리’ 사례를 들어본다.

 

 

  의왕시 인덕원 가까이에 ‘포일세거리로’라는 도로표지판이 있다.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거리’와 ‘路(로)’는 같은 뜻이니 (세)거리•로 또한 겹말[동어반복同語反覆]이되 순서만 바뀌었다. 이곳 포일로(浦一路) ‘세거리’를 1910년대 1/5만짜리 지도 『조선지형도』에는 ‘三巨里’라 쓰고 가타가나 표기로 ‘セゴリ(세고리)’라고 발음을 적어놓았으니 ‘세거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삼거리’가 나왔을 뿐이다. 『조선지지자료』 강원도 편을 보면 거의 100%가 ‘세거리’다. ‘세+거리’라는 토박이말 묶음이 ‘三+巨里’라는 한자로 바뀌는 속도가 서울에서 가까운 순서로 빨랐다. 이런 현상은 ‘술막’이 ‘주막(酒幕)’으로 바뀌는 데서도 볼 수 있다. 한자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에서 자연 발생한 우리말 ‘술막’이 졸지에 문화유산/화석이 되고 말았다.

 


  기왕에 겹말이라도 ‘거리+길’이면 좋을 뻔했다. ‘포일세거리로’ 표지판은 ‘포일세거리+(도)로’이지만 한글로만 적혀 있어서 ‘로(路)’는 거리/길이 아니라 ‘포일세거리(어디)로 가는’ 방향 표지로 읽을 수 있다. 전국에 이런 도로명이 적지 않다. 서울역과 옛 대우빌딩 사이의 길 표지판은 ‘↑서울로’다. 밑에 쓰인 외국어 표지는 ‘Seoullo/首尒路/ソウルロ’. 서울시의 - 서울 안에 있는 -  도로가 ‘서울길’이라는 것도 어색하지만, 서울 중심에 있는데 다시 ‘서울로 가는 방향’을 가리킨다 해도 웃음거리다. 시방 우리나라 길 표지 용어 가운데 ‘대로(大路)’는 그렇다 하더라도 ‘로(路)’는 오해나 웃음거리가 될 소지가 많다. 길/거리의 너비에 따라 길 → 로(2~7차선) → 대로(8차선 이상)로 이름 붙인다고 한다. 우리 토박이말 ‘길’ 이름은 작은 모양새이자 아래/하위에 있고 한자어로 표기해야 크고 높은 내용을 담아낸다는 의식이 마뜩잖다. 전국의 ‘00로’를 조사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길이 어디 한둘인가. 과천시의 ‘뒷골로’(뒷골이 우리말이니 ‘로’를 ‘길’로 고치면 된다. ‘골’로 가다니!), 성남시의 ‘붓들로(붙잡으로/러)’ 따위. 경상도 사투리로 ‘00로’는 ‘00(하)러’ 즉 목적/의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밥 먹으러 간다 → 밥 먹으로 간다’,  ‘무엇하러 → 뭐하로’ 식이다. 한자어를 앞세우다 보니 생긴 사달이자 사단이다. 

   

  이런 잘못된 규칙에서 벗어나면서도 인기 있는 길이 있다. 충청남도 공주보에서 부여보까지를 잇는 길이 ‘백제큰길’이다. ‘백제큰길휴게소’는 포상받아야 마땅한 상호다. ‘대로 ’곁의 상호나 가게 이름은 오히려 ‘큰길00’가 많다. 국민이 관변보다 앞서가고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예에서 보듯이 ‘00마을길’•‘00골길’은 마을/골(洞•谷•里)에다 길(路)을 붙였다. 이렇게 마을 이름에 도로명주소를 합성한 이름도 적지 않다.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버덩마을길 63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구절골길 235 

  

  화성시의 ‘푸른들판로’도 고유어와 한자어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길인지 들판인지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기는 아직도 우리는 아이 이름 지을 때 한자부터 먼저 생각하지 않는가.(해가 갈수록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길+거리에서만이라도 사대주의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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