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 역사·문화기행] 산본(山本) 보다 '산밋'으로100년전 조선지지자료에 순우리말 지명 '산밋' 확인산본(山本)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1919년 3.1운동과 4.11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100년에서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일제가 만든 지명도 청산하여 고유한 우리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지명(地名)은 특정 지역을 구별하고 인식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붙인 명칭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신앙, 전통과 풍속, 연희와 물산(物産) 등의 실정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지명(地名)은 작게는 우리 삶의 터전인 마을에서 국가까지 걸치는 가장 큰 표상(表象)인 것이다.
1914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명과 지지(地誌) 사항을 조사하여 작성한 지리정보 자료이다. 거기에는 100년 전 사용되던 순우리말 지명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전래의 지명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기 시작하는 1911년 당시의 지리정보 모두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산본(山本)의 순 우리말 명칭은 ‘산밋’으로 되어 있다. 즉 ‘수리산 아래(山底里)’라는 의미이다. ‘산밋’이라는 명칭은 이재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도 ‘山底里 산밋’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총9책) 2책(경기도) 과천현 남면에 “금정리(衿井里), 당리(堂里), 봉성리(鳳城里), 당정리(堂井里), 장간리(章干里), ‘산저리(山底里)’, 부곡리(富谷里) 마을과 함께 호구수 460호, 인구수 1929명(남 807명, 여 1,12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산밋’은 ‘수리산 아래’로 100여 전에 잃어버렸던 순수한 우리 마을의 고유명칭인 것이다. 더구나 수리산은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수리산은 속리산, 칠장산, 청계산, 광교산, 관악산 등 한남정맥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산지 중의 하나로 태을봉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 북쪽으로는 관모봉, 북서쪽으로는 수암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리산은 산자락이 많아서 서울 재상들의 조상 묘소가 많이 있다”고 하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수리산 자락에 있는 군포는 3대 문형(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을 포함 7명의 문형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 집안’인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 묘역과 함께 문익공 정광필(영의정)을 비롯하여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집안’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정광필의 아버지), 문익공 정광필(영의정), 동평위 정재륜(효종의 부마)등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군포의 이런 전통과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제식민지시대 만들어진 산본의 명칭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밋’으로 고쳐져야 한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칼럼·오피니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