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주말, 참자연교사회(회장 김현복)가 주관하는 올해 마지막 기행을 다녀왔다. 기행지는 경기도 남양주, 기행코스는 다산 정약용 유적지-흥선대원균 묘-홍·유릉이다. 초등학생 5명과 어른 16명, 도합 21명이 함께 탄 버스는 오전 9시 군포시청을 출발했다.
2002 VS 2020
남양주로 들어서면서 마이크를 잡은 오은택 해설사가 이날의 방문지를 간략히 소개하며, 2002년과 2020년의 소회를 밝힌다. 모두가 기억하다시피 2002년은 ‘월드컵의 해’였고 올해 2020년은 ‘코로나의 해’이다. 2 두 숫자와 0 두 숫자가 위치만 바꿨을 뿐인데 2002년은 ‘희망’, 2020년은 ‘절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개인적 절망까지 겹쳤던 올해에도 드문드문 희망의 빛을 맛본 것처럼, 기행단 여러분도 오늘 유배와 패망이 깃든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라는 주문이다. 멋진 말이다. 갑자기 내 머리속에서도 퍼즐맞추기 하듯 0022, 2200 숫자가 왔다 갔다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AD 22년에서 AD 2200년까지 달려보며 절망의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다산 정약용 유적지
남양주 두물머리 근처의 정약용 생가 주차장에 당도한 시간이 오전 10시, 문화관 입구를 들어서자 옥외 시화국화전이 차려져 있다. 선생의 어록을 담은 시화 액자나 모습을 그린 캘리그래피 작품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오른편 길을 따라 생가인 여유당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1. 여유당(與猶堂).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 유배를 끝내고 자신이 태어난 마재 마을에 거처하면서 당호를 ‘與猶堂’이라 정했다. 노자의 『도덕경』 중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앞뒤 살펴 가며 세상을 조심스레 살아가자’는 뜻이다. 다산은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조상들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했고, 아들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해설사 이진복 교수가 “다산은 공직에 몸담은 지 18년, 유배 생활 18년, 노후 생활 18년간의 굴곡진 삶을 살았다”고 전하자, 나각순 박사는 “다산은 마지막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선비정신, 즉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돕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여유당 바로 뒤편 언덕 선생의 묘소로 오르는 입구에 후손인 전 국회의장 정일권의 각자(刻字)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나, ‘정일권’ 이름자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하얗게 지워져 있어서 자신의 선비정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2. 실학박물관. 생가 바로 담 너머 실학박물관을 찾았다. 건물 외벽에 ‘반계수록(磻溪隧錄),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행사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코로나 시책에 따라 5분 이상 대기하며 실내로 들어서니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 사람인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1622~1673)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 유관의 9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 유흠을 당쟁으로 여의고 15세에 병자호란을 겪는 등 불운한 시대를 보내다가 32세에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에 은거하며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유형원은 나라가 쇠약해진 원인이 나라 전반에 ‘공정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전제(公田制)를 통해 백성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교육 관직체계 국가재정 군현제 등의 개혁안을 제안했다. 유형원이 처음 부안에 당도하여 쓴 시가 마음을 울린다.
외진 남쪽 땅에 와서 몸소 밭 갈며 물가에 사노라. 창을 열면 어부의 피리 소리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이별의 포구는 다 바다로 통하고 산은 반쯤 구름 속에 들었다. 모래밭 갈매기 놀라 날지 않으니 내 장차 너희와 동무하리라
3. 다산생태공원. 정약용유적지를 둘러 본 뒤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두물머리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양수리(兩水里), 우리말로 ‘두물머리’는 두 강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강원도 태백시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충북 북동부와 경기 남동부를 흐르는 남한강과 북한의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강원도 철원군에서 금성천으로 합친 후 화천읍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북한강이 이곳 양평에서 만나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나 박사는 엄밀히 말해 ‘세물머리’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호동의 용해곡 상봉에서 발원하여 인근 서하리의 팔당호로 유입되는 경안천이 있어서다. 데크 전망대에 오르니 『다산시문집』에서 강진 유배를 마치고 고향 마을 소내포구로 돌아오며 지은 시 한 수가 강물 위로 당시 다산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배 타고 소내로 돌아가며 한강에 외배 띄우니 봄바람에 비단 물결 잔잔하여라. 각박한 세상 떠나와 보니 덧없는 인생 위안이 되네 미음(渼陰)의 숲은 끝이 없고 온조(溫祚)의 성곽은 아름답네. 일곱 척 조그만 몸으로 경세(經世)를 어찌하겠나
흥선대원군 묘
다음 행선지인 흥선대원군 묘, 흥원(興園)을 찾아갔다. 화도읍 창현리 산 22-2 입구를 찾느라 헤맨 뒤 20여 분 정도 산을 오른 끝에 겨우 현장에 당도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는 자신의 별장이 있던 고양군 공덕리에 있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고, 1966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비교적 아담한 규모의 원형 봉분이 있고 그 앞에 누군가 놓고 간 소주 한 병이 상석 위에 놓여있다. 봉분 옆에는 좌우 1쌍인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2기씩 각각 서 있고, 하단에는 중앙의 명등석을 중심으로 좌우 1쌍인 망주석·문인석·마석이 2기씩 각각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문인석 망주석은 물론 묘역 아래 신도비가 총탄으로 훼손되어 있다. 파주 이장 중 한국동란에 시달린 증거일 테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며칠 전, 흥선대원군이 10년 섭정을 했던 운현궁을 둘러보고 쓴 시조를 남겨본다.
운세는 천운 아닌 처신이 좌우한다. 현명한 상갓집 개, 파락호 행세 끝에 궁궐의 실세가 되니 세상이 들썩였다.
의롭던 마음가짐, 권력욕에 눈멀어 가진 재주 부려본들 외세(外勢)만 불렸나니 을미년 변고를 불러 파국을 초래하다.
시 속 파락호(破落戶)의 사전적 의미는 ‘행세하던 집의 자손으로서 놀고먹는 건달이나 불량배’를 이르던 말이다. 조선 최고의 파락호는 상갓집 개 행세를 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는 하늘을 찌를듯해 왕좌를 쥐락펴락했는데, 볼품없던 이하응의 아들을 고종으로 낙점하자,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어린 아들을 내세워 10년간 운현궁 섭정 시대를 연다. 초기 개혁정치로 왕권을 강화하는 등 세도정치 타파에 힘썼으나, 며느리 민비와의 불화로 을미사변(1895년)을 자초하고 무리한 정계복귀로 러·일·청 등 외세의 간섭을 키웠다. 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조선 말의 복잡한 내외 정세를 그렸던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빗대어 ‘운현궁의 가을’로 운을 띄워 다녀온 소감을 시로 표현해 보았다.
묘 오른편에는 직계 후손들의 단체 묘가 조성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 씨는 2019년 초 “혼란스럽던 구한말 격랑의 시기를 강인한 정신과 굳은 기개로 살다간 흥선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라고 묘역이 역사를 되새겨보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며 축구장 10배 크기의 이곳 묘역과 임야를 경기도에 기증했다. 이 씨는 앞서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 내 유물 8천여 점을 2007년 서울역사박물관에, 2018년 4월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충남 예산) 묘역 토지도 예산군에 쾌척한 바 있다. 역사적 유물은 한 집안의 굴레에 속할 수는 없다. 용단을 내린 후손에 흥선대원군의 공과가 새롭게 재조명되기를 바래본다.
대한제국의 흥·유릉(洪·裕陵)
이날의 마지막 기행지인 홍·유릉을 찾았다. 홍릉(洪陵)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과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과 순명효황후(1872~1904), 순정효황후(1894~1966)의 합장묘인 유릉(裕陵)과 함께 1970년 5월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8월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禮葬) 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서울 청량리 능(=홍릉)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유릉 또한 1904년 세상을 뜬 순명효황후의 양주 용마산 묘(=유릉)를 순종 인산 때 이곳에 합장하였다. 특이한 점은 홍릉 유릉 두 능명이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의 능명을 따랐다는 점이고 유릉은 조선 유일의 세 사람 합장묘라는 점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參道) 양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어 종래의 조선 왕릉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거다.
첫째, 종래 양이나 호랑이 석상 대신 기린 코끼리 낙타 등 이국적인 동물들의 석상이 갖춰져 있고, 둘째, 종래의 정자각(丁字閣)이 일자형 침전(寢殿)으로 바뀌었으며, 셋째, 조선 왕릉에는 없는 어정(御井)이 갖춰져 있다. 이 중 종래에 없던 어정을 왕릉 가까이 갖춘 이유를 역사에 해박하신 이진복 교수에게 여쭤봤으나 돌아온 답은 ‘모른다’였다. 혹 답을 아시는 분이 계신다면 꼭 알려주기 바라며 ‘홍유릉’으로 운을 띄워 이곳의 방문 느낌을 표현해 본다.
홍문살 들어서니 석상이 생경하다. 유다른 코끼리와 기린과 낙타 행렬 릉 안에 묻힌 망자를 이국으로 이끄네
근처에는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 조선 시대 마지막 원소인 이구의 회인원 등 왕가의 자손들이 묻혀있건만, 해가 뉘엿뉘엿 귀가를 재촉하는 바람에 두 황릉만 둘러본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곳을 확대해 보면 능원(陵園)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세자·왕세자비,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園)’을 함께 일컫는 왕족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패망의 길에도 황제의 면치레는 하고 싶었을까, 황제릉을 흉내만 냈을 뿐,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탈탈 털고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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