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철 칼럼] 공정 혹은 불공정, 무엇이 문제인가?

심규철 변호사 | 기사입력 2021/07/29 [10:12]

[심규철 칼럼] 공정 혹은 불공정, 무엇이 문제인가?

심규철 변호사 | 입력 : 2021/07/29 [10:12]

▲   심규철 변호사   © 군포시민신문

다가오는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공정(公正)”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만큼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난 일련의 행태에 공정을 해한 모습이 많았다고 국민들이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불공정이 크게 문제 된 사례를 돌이켜 보면 인천국제공항공단(인국공)의 비정규직을 일괄로 정규직화 하도록 한 문제,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갑자기 여자하키 선수팀을 북한 선수단과 단일팀으로 구성하여 출전하도록 한 문제,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들의 대학입학 과정이나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아들의 편법 휴가 등에서 나타난 부모찬스 개입 문제, LH 직원들이 개발정보를 부당하게 활용하여 한 특혜 투기 등의 모습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일련의 이러한 모습들이 반복되면서 국민들에게 문재인 정부의 불공정에 대한 반발 심리가 크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공정이라는 문제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화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법적 정의는 여기에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의 현행법에서 공정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정도는 짚어보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공정에 관한 헌법적 근거는 헌법 제11조가 규정하고 있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평등권 조항에서 유래함이 틀림없다 하겠다.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권이 모든 사람을 모든 경우에 같게 대우하라는 절대적 평등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라는 상대적 평등을 의미한다는 데 대하여는 이견이 없다.

 

민법 제104조는 “불공정한 법률행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사자의 궁박·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불공정거래행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부당하게 경쟁을 방해하는 행위의 유형을 불공정거래행위로 규정하면서 이를 규제하고 있고, 또한 공정거래에 관한 업무의 총괄적 규제·감독을 위하여 공정거래위원회라는 합의제 기관을 국무총리 소속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 법에서 서로 상이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정이라는 말을 다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이 공정이라는 말에 관심을 갖고 또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말이 화두를  이루게 된  것은 정부의 정책이 그 내용이나 절차적 합리성을 결여하여 국민의 기대권이나 기득권 혹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인식된 경우, 특권층이 부당하게 그 지위를 남용해 반칙을 써서 특혜를 누리는 경우 등을 보면서 국민들이 그 정책이나 특권층의 행태에 반감을 가지게 된 데서 연유한다 하겠으므로, 여기서의 공정이라는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개념으로서, 아무리 정부가 선의로 하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가지게 된 기대권이나 신뢰, 혹은 기득권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혹은 절차적 정당성 없이 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한 특권층이 그 지위를 남용해서 일반 국민들이 가지는 기회를 새치기하지 말라는 뜻과 같은 개념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국민들이 요즘 공정이라는 말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정부나 특권층에 어떤 특별한 희생 내지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를 요구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라, 정부도 법치주의적 절차를 잘 지키고, 특권층도 그 지위를 남용해 경쟁 질서를 깨뜨려서 일반 국민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달라는 정도를 요구하고 있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공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대학입시인 것 같다.  거기에 국민개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권층의 편법적인 병역면제 문제가 공정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어 오곤 했다.

 

우리나라도 명문대라는 소위 스카이대학에 경제적 상류층 자제의 진학비율이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계속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수 년 전 출간되어 공전의 히트를 한 “정의란 무엇인가(what is justice?)”에 이어 또다시 ‘낙양의 지가’를 높이고 있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교수의 최근 작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횡포’정도가 될 것 같음)”의 첫 번째 주제도 미국 대학입시에서의 불공정문제이다. 샌델 교수는 우리의 스카이대학에 해당하는 미국의 명문대학에의 입학에서 소득 상위 1%(연간 63만 달러 이상)에 드는 사람들 자제들의 입학 비율이 하위 50%에 드는 사람들 자제들의 입학비율보다 높다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출발에서부터 다른) 능력에 따른 평등 대우 내지 기회 균등의 보장이 과연 결과의 공정성도 보장하고 있느냐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부의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과제라 할 것인데 비해,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 있는 공정의 문제는 그보다도 더 낮은 수준의 문제라 할 수 있는 정부의 법치주의의 위반 내지 적법절차의 문제 혹은 특권층의 반칙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마침 샌델 교수도 위 저서의 도입부를 2019년에 크게 문제 된 미국 대학 입시에서의 소위 “옆문 입학(side door)”사건의 소개로 시작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위 기여 입학제라 하여 경제력 있는 부모가 그 자녀를 보내고 싶은 대학 당국에 어느 정도의 금전적 기여를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제의하여 이를 그 대학 당국이 받아들여 입학시키는 제도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샌델 교수는 이를 “뒷문 입학(back door)”이라고 하면서, 이는 그 기여금이 그 대학의 모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  여건  개선 작업 등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런 대로 그 제도의 정당성이 인정되어 왔지만, 소위 “옆문 입학”의 경우는 그 불법을 주도한 인물(“윌리엄 싱어”라는 미국 대입 컨설턴트)이 학부모들로부터 거액을 받아 그 돈을 대학당국에 공식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입학에 관여하는 특정 사람(예컨대, 체육특기생의 경우는 특정 종목의 감독)에게 그 돈을 전달하여 특정인만 배부르게 하면서 SAT 등 서류 조작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을 시도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공정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소위 가진 자들이 나름 법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실력발휘를 하고 있는 결과 발생하고 있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문제 내지 부의 양극화 문제 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법치주의의 적법 절차를 무시하는 조치를 하여 국민의 기득권이나 기대권을 침해하거나 조국 전 장관의 예에서 문제된 소위 “옆문 입학”내지 가진 자들의 불법과 편법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성취한 것에 대하여 칭찬 혹은 인정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능력 있는 사람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여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을 이끌어 온 것은 틀림없다 하겠고, 우리 헌법 제119조 제1항도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할 기회를 주고, 그 성취를 존중해 주며, 그 성취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시스템이 아담 스미스 이후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이끌어 온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타고난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며, 그 능력은 자신의 고유한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 부모의 능력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고, 능력이 발휘되기까지는 사회적 도움 및 운이나 신의 은총도 많이 개입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할 것이라는 태도를 가질 때,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하여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성취 경쟁에서 실패하거나 뒤쳐진 사람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임도 틀림없다 하겠다.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여 나름의 사회적 성취를 한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할 때, 신약성서에서의 사도바울의 말씀이 떠오른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의 균등과 절차의 공정을 활용하여 어떤 성취를 하고 나면 ‘자신은 능력이 있고 남보다 노력을 많이 해서 성취를 하였기 때문에 그만한 대가를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지상주의적 사고는 자신의 성취에 대하여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제거하고 또한 자신을 약자(패자)와의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 내지 약자와의 연대감(solidarity)을 약화시켜서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를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 샌델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성취한 사람이 가져야 할 감사나 겸손의 태도 및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의 이러한 개인 차원의 도덕성의 문제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도록 우리 사회가 전반적인 도덕성의 수준을 높여나가야 할 문제이겠지만, 이것을 제도화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라 하겠다.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문제는 소득불균형 내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문제, 양극화 해소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는 결국 국가의 경제·사회적인 정책적 접근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라 할 것이고, 따라서 이는 그 때 그 때 선거를 통해서 어느 정당의 정책이 양극화 해소에 더 매력적인가의 국민적 선택을 받아 해결되어 나가야 할 문제라 하겠다.

 

그런데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정의 문제는 앞서 본 바와 같이 마이클 샌델 교수가 문제 삼는 능력지상주의(meritocracy)의 발현에 따른 결과적인 불평등 혹은 사회적 양극화 문제 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법치주의의 위반에 따른 불공정의 문제 혹은 특권층의 도덕성 결여에 따른 반칙과 특권의 남용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서, 차원이 다른 낮은 수준 의 불공정의 문제라 하겠다.

 

정부가 지난 2018.1.초 평창동계올림픽을 얼마 안 앞두고 여자아이스하키팀을 남북단일팀으로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자, 젊은 세대는 그 동안 올림픽에 대비하여 출전 준비를 해 온 여자하키선수들의 입장과 처지에 공감하면서, 아무리 남북관계가 중요해도 그런 식으로 정부가 여자하키 선수들과 아무런 상의 없이 갑자기 힘으로 남북단일팀 구성을 밀어붙여서 일부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갑자기 빼앗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국민적 공분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는데, 국민을 존중하고 법치주의 정신에 충실한 온전한 정부라면 생각할 수가 없는 발상이었다. 

 

인국공 사태는 대통령이 인국공의 경영과 인사에 직접 지시(실제는 강요를 한 것임)를 하는 형태를 통해 비정규직을 일괄적으로 정규직화 하도록 한 것으로서, 그로 인해 인국공의 경영에 큰 부담을 안기고, 정규직의 반발을 샀을 뿐 아니라, 인국공 정규직 취업준비생들에게도 자신들의 취업기회를 박탈하는 불공정한 처사라는 반발을 샀는데, 필자가 보기엔 당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인국공에 갑자기 대통령이 정규직화 지시를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법치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여준 부끄러운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조국 사태와 LH 직원들의 투기 문제는 우리 사회 특권층과 기득권 층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준 부패 문제로서 공정 차원에서 접근할 가치도 없는 문제라 하겠다.  결국 특권층에게도 가감 없는 엄정한 법의 적용을 통해서 이를  바로잡을 수밖에 없는 문제라 하겠다.

 

이마저도 문재인 정부는 소위 검경수사권조정을 통하여 검찰의 수사권한을 무력화시킨 데다가 공수처를 별도로 설치하여 정권과  관계된 사건이 터지면 어느 기관이 먼저 수사를 할 것인지를 놓고 서로 눈치를 보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바, 이래저래 정권의 도덕성 내지 공정 감각은 더 무뎌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Adam Smith(1723-1790)는 1776.에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썼다. 국부론의 앞 부분에서 스미스는 유명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탁에서 빵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제빵업자와 정육업자의 자비심이 아니라 돈을 벌고자 하는 제빵업자와 정육업자의 이기심(self-interest)때문이다.”  스미스는 그보다 앞서 1759.에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출간했는데,  도덕감정론의 요지는 “이타적인 행위든 이기적인 행위든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스미스는 이신론자理神論者여서 이런 표현을 썼으나 공정한 관찰자란 결국 기독교의 GOD 혹은 ‘선량한 양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의 공감(sympathy)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돈을 벌려는 이기심을 가진 평범한 개인이 주체가 되어 움직여지는 체제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그 이기심이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 내지 양심과 조화를 이루어 제어되는 것을 전제로 스미스는 자유시장경제를 설계했던 것인데, 대한민국의 특권층에게는 그 이기심을 제어할 공정한 관찰자 내지 양심이 없어 보이는 현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대통령과 정부에 의하여 침해되면서 공정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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