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정관재(靜觀齋)로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분신자결한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 김익겸(金益兼, 1614-1637)의 아들로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 숙종의 원비)의 아버지이고 『구운몽(九雲夢)』을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형이다.
김만기 선생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31호)에는 김만기 선생의 묘와 함께 김만기의 아들 김진구(金鎭龜, 1651-1704) 손자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묘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김만기 선생의 묘소는 이 묘역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원부부인 한씨(西原府夫人 韓氏)와의 합장분을 중심으로 어필비, 묘표,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 등의 옛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맨 아래 산언저리에 서 있다.
어필비는 176cm의 방부원수형(圓首方趺圓首形)으로 복련(覆蓮), 당초문(唐草紋),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전면에 ‘어필(御筆)’이라고 전서로 쓴 후 ‘國舅保 社功臣光城府院君諡文忠金公萬基之墓’란 숙종이 쓴 면서를 새겼다. 뒤의 음기는 아들 김진구(金鎭龜)가 지었고 건립연대는 1699년(숙종 25)이다. 음기에는 묘표를 세운 돌을 숙종이 하사한 점, 한 때 보사훈(保社勳)이 삭탈되었는데 그것을 지우지 못한 사정 그리고 보사훈이 다시 회복되고 숙종이 어필로 묘표의 큰 글씨를 써준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시호교지에 의하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시기는 숙종 45년(1719년)이다. 어필비 건립연대보다 20년 뒤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충’의 글씨는 숙종의 어필이 아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2년(1766년) 11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1716-1790)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숙종)에서 광성 국구(光城國舅)의 표석(表石)을 친히 쓰셨는데, 그때에 미처 시호(諡號)를 내리지 아니하여 ‘시(諡)’자 밑에 두 글자를 비워두고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시호를 내린 뒤에 즉시 써서 새기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밑에서 쓰는 것은 감히 할 바가 아니므로, 아직 새기지 못하였습니다.”라 하자, 영조가 "내가 마땅히 이어서 쓸 것인데, 진실로 귀하다. 시호의 글자가 무엇인가?" 하매, 우의정 김양택(金陽澤,1712-1777:김만기 손자)이 말하기를, "문충(文忠)입니다."라 하였다.
따라서 광성부원군 어필비의 ‘문충(文忠)’ 글씨만은 영조의 글씨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세히 어필비를 보면 ‘문충(文忠)’의 글씨가 약간 작은 감이 있다. 이처럼 광성부원군 어필비에 숙종과 영조 두 분의 어필이 함께 있는 특이한 케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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